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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왕의 영대(靈臺)를 찾아서

기획 - 천상 (선녀) 2025년 夏

문왕의 영대(靈臺)를 찾아서01

 

대진대학교 대순종학과 차선근 교수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영대. 앞마당에 연못과 동산으로 조경되어 있다

 

 

대순진리회 도장은 경건한 마음과 예의를 갖춰 다녀야 하는 성역(聖域)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핵심은 상제님과 천지신명을 모신 영대(靈臺)다. 천상의 옥경(玉京)이 지상에 내려온 도통진경의 성전(聖殿)이니, 이곳에서는 지극한 정성과 공경의 예절을 다해야 한다.02
 

  다음은 영대와 봉신(封神)에 대한 도전님의 훈시다.

 

“복희씨는 신명을 천상의 옥경대, 하늘에 봉했고, 문왕은 영대를 둬서 천지신명을 모셨다가 땅에다 봉했고, 이번에는 천지신명을 모신 데가 우리 도장이고 사람에게 봉한다.”03

 

“복희 선천에는 하늘에다 봉신(封神)을 하였고, 문왕 때에는 모든 운수가 땅에 있어서 땅에 봉신을 하였다. 방위를 보고 날짜를 보는 것은 신을 땅에다 봉했기[神封於地] 때문이다. 살아서는 집터를 보고, 죽어서는 묘 터를 보고 방위를 본다. 나도 방위나 시간, 위치를 세밀하게 본다. 흥하고 망하는 것이 다 땅에 달려 있다. 앞으로는 정역시대다. 정역시대에는 모든 운수가 사람에게 있어서 사람에게 봉신을 한다. 앞으로는 신봉어인(神封於人)한다.” 04


 주나라 문왕(文王, 서기전 1152∼1056 추정)05은 삼천여 년 전 창생(創生)을 널리 구제하기 위하여[廣濟] 제왕으로 이 세상에 왔던 분이다.06 도전님의 가르치심에 의하면 문왕은 천지신명을 모시기 위해 영대를 세웠으며, 그 후 천지신명을 땅에 봉했다[封神].


  대순진리회 영대의 명칭은 문왕이 세웠다는 영대로부터 따왔다는 것이 주지된 사실이다. 그러면, 비록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문왕이 세운 영대의 흔적이 남아 있을까? 있다면 그 장소는 어디일까? 전통 문헌들은 하나같이 문왕 영대가 신명을 모신 곳이 아니라 천문관측소일 뿐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문왕 영대에 천지신명을 모셨다는 도전님의 훈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오래전부터 이 물음을 머릿속에 넣어두고만 있다가, 문득 하루는 중국 지도를 펼쳐 문왕이 세운 영대의 흔적이나 유적지[遺址]가 있는지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것이 간쑤성(甘肃省)의 링타이현(灵台县), 즉 ‘영대현(靈臺縣)’이라는 지명이었다. 영대현? 설마 이곳에 영대가 있었나? 서둘러 링타이현에서 발간한 『영대현지(灵台县志)』07를 찾아 주문했다. 

 

꽤 시간이 걸려 도착한 서적에는 문왕이 최초로 세웠던 영대의 흔적, 즉 ‘고영대(古灵台)’의 짧은 현황과 복원한 영대의 사진이 실려있었다. 이것을 계기로 더 많은 자료를 모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앞선 물음들에 대한 답변은 물론이요, 문왕이 링타이현 영대 외에 지금의 시안시(西安市) 외곽에 영대를 한 개 더 세웠다는 사실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더불어 대순진리회 영대 앞마당에 연못과 동산이 놓이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공작(孔雀)이 도장에 키워지는 이유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남은 일은 현지답사를 통한 실제 검증이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져 해외로 나가는 게 금지되었다. 얼마간 고민하다가 일단, 정리된 자료부터 학계에 공개ㆍ발표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출판된 논문이 「물질종교 관점에서 본 영대」(2023)였다.

 

중국에 갈 기회는 2024년이 되어서야 왔다. 그해 8월 중국 북경대학에서 열린 학술대회 ‘동아인문논단(東亞人文論壇)’ 발표를 마치고 난 뒤에야, 부랴부랴 시안 외곽에 있는 영대를 찾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 부족으로 거리가 먼 링타이현의 영대까지는 갈 수가 없었다. 몇 달이 더 지난 2025년 1월이 되어서야 그곳을 방문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문왕 영대들의 역사 정리가 완결되었다. 이 글은 그 보고서로서, 2023년에 간행한 논문 내용을 쉽게 풀이하고, 두 차례 현지답사를 갈무리하며, 새롭게 추가한 자료들까지 더 보강한 것이다. 모쪼록 이 글이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문왕의 영대들을 실증적으로 이해하는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문왕이 천문을 관측하기 위해 영대를 세웠다는 전승들
2. 문왕의 영대제천(靈臺祭天) 전설과 유적지 : 고영대(古灵台)
3. 문왕이 풍경에 두 번째로 세운 영대 : 서주문왕영대(西周文王灵台)
4. 강태공과 봉신대(封神臺), 지존(地尊)과 인존(人尊)



1. 문왕이 천문을 관측하기 위해 영대를 세웠다는 전승들

 

  문왕이 영대를 세운 이유부터 살펴보자. 영대는 높이 쌓아 올린 건축물인 대(臺)의 일종이다. 대개 제왕은 대를 축조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가장 유명한 것이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높이 9m의 경주 첨성대(瞻星臺)다. 고려 개경에도 첨성대가 있고, 조선 한양의 창경궁과 관상감에도 각각 관천대(觀天臺)가 있다.08


  동아시아 제왕들이 대를 세웠던 이유는 첫째, 천의(天意)를 알고자 함이다. 구체적으로는 요사스러운 기[祲氣]가 국가에 재앙을 일으키려고 하는지, 또는 상서로운 기가 길사(吉事)를 만들려고 하는지를 알아내려는 것이다.09 고대 동아시아에서 제왕은 천자(天子)였고, 천자는 천(天)을 대신하여 천하(天下)를 통치하는 존재였다. 그러므로 천자는 하늘의 뜻[天意]을 파악하는 수단이 당연히 있어야 했다. 천자가 하늘의 뜻을 알지 못한다거나 알아낼 방법조차 없다면, 그것은 곧 하늘의 뜻을 백성에게 펼치는 통치자 자격이 없음을 말한다. 따라서 천의를 읽기 위한 건축물인 대의 축조는 천자가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10
  제왕들이 대를 세우는 둘째 이유는 해ㆍ달ㆍ별의 움직임을 살펴 계절과 시간을 파악함으로써 백성이 농사를 비롯한 각종 생활을 영위하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전통 시대에 달력을 만드는 작업은 고도의 축적된 기술과 전문 노동력이 요구되었으므로 어느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곳은 국가가 유일했다. 천자가 통치하는 국가는 대를 세워 천체의 변화를 읽고 예측하였으며, 그 결과를 달력으로 만들어 배포함으로써 백성의 삶이 안정되도록 했다.
  이 두 가지 이유로 해서 그동안 문왕의 영대도 전통적인 대와 마찬가지로 천자가 천의를 읽거나 달력을 제정하기 위해 하늘을 관측하는 천문대였던 것으로 이해되었다.11 예를 들어 중국 전한(前漢)의 유명한 학자 유향(劉向, 서기전 77∼6)은 그의 저서 『설원(說苑)』에 다음과 같이 썼다.

 

무릇 천문 지리를 사람이 본받아 마음에 담아둔다면, 즉 (그것은) 성스러운 곳간이 된다. 고로 옛적에 성왕이 이미 천하에 임하여, 반드시 변화하는 사시(四時)로 율력(律曆: 樂律과 曆法)을 정하고, 천문을 관찰하여 시간의 변화[時變]를 헤아리며, ‘영대(靈臺)’에 올라 그로써 기분(氣氛: 기운의 조짐)을 살폈다.12

 

  유향은 문왕이 영대를 지은 후 약 천 년이 지난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그의 기록을 통해서, 영대는 계절과 시간 및 천기(天氣)를 살피기 위한 천문관측소로 이해되었음이 확인된다.
  16세기에 간행되어 동아시아에 광범위하게 유포된 고전 소설 『봉신연의(封神演義)』13도 유사한 이야기를 전한다.

 

(문왕이 말하기를) “이곳에 영대(靈臺)를 세우고 그로써 재앙과 상서(祥瑞)의 조짐에 응하고자 한다.”14

 

(문왕이 백성들에게 알리기를) “근래에 보니 재앙이 자주 나타나고, 비도 때맞춰 내리지 않는다. 나라[本土]를 살피고 길흉을 점치고자 하나 제단[壇址]이 없는지라. 어제 보건대, 성 서쪽에 있는 관청 소유의 땅을 보고 그곳에 하나의 대(臺)를 세워 영대(靈臺)라고 이름하고, 그로써 기후를 점치고 백성에게 재앙이 생길 징조를 보려 하노라.”15

 

  민간 전승 설화를 각색한 『봉신연의』에서 영대는 신을 모시기 위함이 아니라 재앙과 상서의 조짐을 살피고 점을 치기 위해 건설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유향 이후로도 1,600여 년 동안 영대는 일종의 관측대였다는 인식이 줄곧 이어졌다고 해야 한다.


  한국에서도 영대는 천문을 살피던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조선 후기 개혁가이자 다방면에 걸쳐 학문적 역량이 매우 뛰어난 인물로 알려진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임금이 정약용(丁若鏞, 1762∼1836)과 나눈 대화를 들어보자.16

 

【정조】 “영대(靈臺)는 문왕이 처음 세운 것이 아니다. 『춘추좌씨전』 「애공 25년」 조목에 ‘위나라 군주가 자포(藉圃)에 영대를 세웠다’라고 하였고, 『전한서(前漢書)』 「지리지(地理志)」에는 ‘제음군 성양현에 요임금의 영대가 있었다’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장제본기(章帝本紀)」에 ‘성양현의 영대에서 요임금에게 제사를 올렸다’라고 하였다. 영대는 이전에 있던 명칭으로 문왕이 단지 이어서 사용한 것이다. 대개 재이(災異)와 상서(祥瑞)를 살피고 운기(雲氣)의 변화를 관측하는 것이 모두 신령한 일이기 때문에 ‘영(靈: 신령하다)’이라고 부른 것이다. … 『유씨외기(劉氏外記)』를 살펴보니, ‘황제(黃帝)가 영대를 설치하고 오관(五官)17을 세웠으며, 그로써 오사(五事)18를 질서 있게 했다(黃帝設靈臺立五官, 以序五事)’라고 한다. 그렇다면 영대라는 명칭은 황제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정약용】 “신은 대답합니다. 황제가 영대를 세웠다는 설과 요임금이 영대를 세웠다는 설은 (유교의) 경전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왕이 국가를 개창(開創)하면 반드시 운기의 변화를 관측하는 대(臺)를 세웁니다. … 생각건대, 황제헌원씨와 요임금 시절에도 이상한 기상(氣象)을 관찰하는 대가 있었고, 주나라의 영대와 그 용도가 실제로 같았기 때문에 그 명칭을 빌려서 불렀던 것입니다. … 따라서 영대라는 명칭은 문왕에서 시작되었고, 이상한 기상을 관찰하는 제도는 황제헌원씨와 요임금 시절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대화에서 확인되는 사실은 제왕이 나라를 건국하면 대(臺)도 반드시 세운다는 것, 황제헌원씨와 요임금도 대를 세웠다는 것, 유가(儒家)의 공식 경전(특히 『시경』)에 근거를 둔다면 영대라는 명칭의 대는 주나라 문왕이 처음 세웠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 영대의 용도는 재이(災異)와 상서(祥瑞)를 살피고 기상(氣象)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 등이다.

 

이상과 같이 지난 삼천 년 동안 문왕의 영대는 천문을 읽는 관측소였다고 알려져 왔다. 역사적으로 보면 영대라는 명칭은 학궁(學宮), 무덤이나 제단, 삼년상 동안 신위를 모시는 집, 궁벽한 거처, 마음, 머리, 경혈 가운데 하나[靈臺穴], 별자리[靈臺三星], 지방의 이름[靈臺縣], 문예 잡지 이름19 등 다양하게 사용되었으나,20 문왕의 영대만큼은 천문관측소로 이해되었다는 뜻이다.

 


2. 문왕의 영대제천(靈臺祭天) 전설과 유적지 : 고영대(古灵台)

 

  문왕 영대가 천문관측소였다는 전승은 상제님을 모신 신전이 영대라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제왕이 대(臺)를 세워 하늘의 뜻[天意]을 살피는 일이 비록 신령스러운[靈]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천문관측소 건물이 상제님과 천지신명을 모시는 신성한 신전 이름이 되어야 하는 적확한 이유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이제 밝힐 사실은 간쑤성(甘肃省) 링타이현(灵台县)에 문왕이 영대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영대제천(靈臺祭天)의 전설이 전해온다는 것이다. 링타이현의 지방지인 『영대현지』에는 그 내용이 소략하게 언급되고 있다.21 링타이현 지방 공무원이자 향토 사학자로서, 그 지역의 역사를 편찬하는 총책임자 장신민(张新民)22은 이 전설을 정리하였다.23 그 자료들을 참고하여 일의 전말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문왕이 살았던 시대에 중국 중원을 다스리던 천자는 은나라 주왕(紂王)이었다. 문왕은 왕이 아니라 기산(岐山) 지역의 제후 신분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기산에 처음 자리를 잡았던 고공단보(古公亶父)의 아들 계력(季歷)이었다. 계력은 주변 부족들을 흡수하면서 세력을 키워나갔고, 그때 은나라의 임금 문정(文丁)은 계력을 ‘방백(方伯)’으로 봉하면서 서쪽 제후들의 우두머리라는 뜻의 ‘서백(西伯)’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그러나 문정은 강대해지는 계력을 위험한 인물로 간주하고 감금하여 살해했다. 계력이 사망하자 그 아들이 ‘서백’ 칭호를 물려받아 ‘서백창(西伯昌)’으로 불리게 되었다.24


서백창, 즉 서백은 어질고 덕이 높았다. 그런 그를 따르는 무리는 늘었고, 기산 지역의 세력은 더욱 강성해졌다. 반면에 은나라 문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주왕(재위 서기전 1075∼1046 추정)은 폭정을 일삼아 민심을 잃고 있었다. 당시 주왕은 달기의 제안을 받아들여 ‘포락(炮烙)’을 만들었다. 이것은 기름칠한 큰 청동 기둥 위에 죄인을 맨발로 걷게 하고, 미끄러져 떨어지면 불구덩이에 타죽게 만드는 끔찍한 형벌이었다. 서백은 잔혹한 포락의 형벌을 없애달라는 청을 올리면서 서안 지역의 땅을 바쳤다. 주왕이 이를 받아들여 포락의 형을 없애자, 서백을 향한 제후들의 존경은 높아졌다. 서백에게 귀순하는 제후들이 늘어나자, 주왕은 서백을 경계하여 그를 옆에 묶어두고 감시하고자 했다. 그래서 주왕은 서백을 고향 기산에서 황하를 건너 동북쪽으로 640km나 떨어진 작은 성인 유리[羑里城遗址]에 가두어버렸다. 유리는 270여 년간 은나라 후기의 도읍이었던 안양[安陽 殷墟], 그리고 주왕 자신이 새 도읍으로 거주하고 있던 조가(朝歌)25의 가운데 위치한 곳이었다.

 

▲ 문왕의 활동 지역. 주나라에는 ‘위수’가 관통하여 흐른다. 주나라와 은나라 사이에는 ‘황하’라는 거대한 자연 장벽이 놓여있다. (지도: 바이두)

 

 

서백은 7년이나 유리에 갇혀있으면서도 384 효사(爻辭)를 지음으로써 26 『주역』을 체계화하는 업적을 냈다. 서백의 충신 산의생(散宜生)은 강태공과 함께 서백의 석방을 위한 외교 노력에 힘썼다. 결국 주왕은 서백을 풀어주었고, 아울러 그에게 군권의 상징인 활ㆍ화살[弓矢]과 도끼[斧鉞]를 하사하고 주변 제후들을 정벌할 수 있는 군사권까지 맡겼다.27 아마 서백은 죄 없이 갇혀있으면서도 원망을 내비치지 않고 바른 처신을 함으로써 은나라 주왕과 대신들에게 상당한 신뢰를 얻었던 것 같다.


  서백이 고향 기산으로 돌아왔을 무렵, 제후국인 우국(虞國)과 예국(芮國)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두 나라의 대표들이 중재를 받기 위해 서백을 찾았는데, 기산 지역 사람들이 서로 예를 지키며 양보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가 다투는 것은 이곳 사람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일이다. 계속 다투는 것은 수치일 뿐이다.”라고 말하며 분쟁을 스스로 그만두었다. 이후 서백은 곧 제후들의 모범이 되었다. 이로부터 제후들은 서백을 ‘왕’으로 추대했고, 서백은 ‘문왕(文王)’이라는 칭호로 불리게 되었다.28


  문왕은 즉위 2년째에 견융(犬戎: 기산의 서쪽)을 정벌했다. 이듬해인 즉위 3년째에는 밀수(密须: 현재의 간쑤성 링타이현 서쪽)를 공격하여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29 그런데 견융과 밀수는 은나라 주왕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다하는 부족들이었다. 따라서 문왕이 주왕으로부터 제후들을 정벌할 군사권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견융과 밀수를 치는 행위는 천자국 은나라에 대한 반란으로 비추어졌다.
  밀수를 완전히 굴복시킨 문왕은 본거지인 기산으로 회군을 시작했다가, 얼마 가지 않아 지금의 링타이현 형산(荆山) 아래 하천인 백리계[百里溪: 지금의 달계하(达溪河)]에 이르러 제왕만이 세울 수 있는 대를 쌓기로 결심했다. 그곳에서 천제(天祭)를 올림으로써 천자가 되라는 천명(天命)을 하늘로부터 받고, 그러한 사실을 대내외에 널리 공포하고자 했던 이유였다. 견융과 밀수를 정벌하여 은나라 주왕에 대한 반기를 높이 든 상황이었으니 망설일 까닭이 없었다.

 

문왕은 군사들에게 대를 건설하고 그 이름을 ‘영대(靈臺)’라고 한 뒤에, 그곳에 하느님[上帝]을 모실 제단을 설치하도록 했다. 이어서 귀복(龜卜)으로써 천제를 올릴 날짜를 잡고, 각 지역의 제후들에게 영대로 와서 참여하라고 통보했다. 천제를 올릴 자격은 천자인 은나라 주왕만이 갖는 것이었다. 문왕이 제후들을 모아 천제를 직접 거행한다고 함은 명백히 주왕을 거역하겠다는 뜻을 대내외에 드러내는 일이었다.


  문왕을 따르기로 뜻을 정한 제후들은 정해진 날짜에 모여들었다. 문왕은 영대에 설치된 제단에 제물을 차리고, 각 제후에게 거두어들인 옥규(玉珪: 옥으로 만든 물품으로서 천자에게 분봉을 받을 때 같이 받았던 신분 증거물이자, 제후가 치성 때 바치는 信義의 상징)들을 바치고 천제를 시작했다. 그리고 포악하며 실덕(失德)한 주왕을 대신하여 자신이 천자가 되어 백성들을 구제하도록 해 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천제가 끝나고, 문왕은 영대에서 내려와 제후들에게 자신이 천자가 되라는 천명을 받았음을 선포했다. 은나라를 멸하고 새로운 주인이 되라는 하늘의 뜻에 거역하는 자가 있다면 밀수처럼 패망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도 했다. 제후들은 차례로 영대에 올라 제단에 향을 꽂으며 문왕에게 내린 하늘의 명령에 따르겠다고 맹세하며, 상주혁명(商周革命)의 전쟁에 참여할 것을 다짐했다. 이로써 문왕은 자신을 따르는 제후들과 그렇지 않은 제후들의 구분을 명확히 하면서, 혁명의 의지를 대외에 널리 알리고 대업을 향한 본격적인 길에 나서게 된다.30


은나라를 멸하고 중원을 차지하려면 나름의 명분이 필요한 법이다. 비록 주왕이 포악하다고 하더라도 은나라는 성군(聖君) 탕왕 이후 600년이나 존속해 온 나라다. 이 때문에 문왕은 혁명의 정당성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그는 상제를 모셨던 은나라의 유풍에 따라31 본인이 직접 천제를 올려 ‘천하의 주인이 되라’는 명령을 받고자 했다.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았으면 천자가 되어야 한다.
  문왕이 하늘, 즉 ‘상제’로부터 여러 차례 천명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시경(詩經)』 「대아(大雅)ㆍ문왕지습(文王之什)」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假哉天命 有商孫子 드높은 천명은 상(은)나라의 자손에게 있었고
商之孫子 其麗不億  상(은)나라의 자손은 수없이 많았는데
上帝既命 侯于周服  상제께서 명하시어 주나라에 복종케 하셨도다.
32

 

天位殷適 使不挾四方 천자 자리가 은나라에 있었으나, 세상을 가지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維此文王 小心翼翼 오직 이 문왕께서는 삼가고 조심하여
昭事上帝 聿懷多福 상제를 밝게 섬기고 마침내 많은 복을 품으니
厥德不回 以受方國 그 덕 어긋남이 없어, 사방의 나라를 얻었도다.
天監在下 有命既集 하늘이 아래를 굽어 살피사 천명이 내렸느니라.
33

 

皇矣上帝 臨下有赫 위대하신 상제께서 위엄있게 세상에 임하시어
監觀四方 求民之莫 사방의 나라를 두루 살피시고 백성의 고통을 구하시니

帝謂文王 無然畔援 상제께서 문왕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배반함이나 횡포함이 불가하고
無然歆羨 誕先登于岸 탐욕이 없으니, 뛰어나 먼저 공을 이루리라

帝謂文王 予懷明德 상제께서 문왕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덕을 밝히는 자를 좋아하니
不大聲以色  큰 소리로 화를 내거나 얼굴을 붉히지 말고
不長夏以革  형벌이나 전쟁 도구를 귀히 여겨 늘리지 말며
不識不知 順帝之則 알지 못하는 것은 상제의 법도만을 따르라.
帝謂文王 詢爾仇方 상제께서 문왕에게 이르시기를, 이웃 나라에 자문을 얻고
同爾兄弟 以爾鉤援 형제의 나라와 함께 적의 성벽을 오를 사다리 [鉤援]와 
與爾臨衝 以伐崇墉 임거(臨車)와 충거(衝車)를 이용하여 숭나라의 성벽을 부수라.
34

 

  즉위 3년째 밀수를 정복하고 영대를 건설하여 상제에게 올린 천제로써 천명을 얻었음을 선언한 문왕은 숭(崇)나라도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니, 즉위 6년째의 일이었다. 이후 문왕은 대업 도전을 위해서 근거지였던 기산을 떠나 동쪽으로 도읍을 옮기게 된다.

 

▲ 링타이현에 문왕이 최초로 세운 영대의 위치, 주소는 ‘甘肃省平凉市灵台县东大街19号’이고, 오늘날 ‘고영대(古灵台)’로 불린다. (지도: 바이두)

  

 

지금까지가 링타이현에 전해지는 영대제천(靈臺祭天)의 전설이다. 이에 의하면 문왕이 영대를 세운 이유는 천문을 살펴 시간과 절기를 파악하거나 길흉을 점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는 견융과 밀수를 토벌한 후 ‘득천명(得天命)’, 그러니까 상제를 모시고 치성을 올림으로써 천자가 되라는 천명을 하늘로부터 얻기 위해 링타이현 형산 아래에 영대를 세운 것이었다.
  이 영대는 전쟁 직후에 급하게 만들어졌다. 당시 문왕의 군사들은 영대를 건설하기 위해 흙을 가져다가 성벽처럼 높이 쌓고 그 위에 제단을 설치했다고 한다. 링타이현과 그 일대는 황토가 가득한 곳이어서, 건축 자재로서 흙을 조달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링타이현에 황토로 쌓은 최초의 제단 영대는 삼천여 년의 세월을 지탱하면서 20세기 초까지 유지되었다. 물론 세월을 이기지 못하여 풍파에 황토가 깎여 나가 20세기 초에는 높이가 2장 남짓(약 6.7m)에 바닥의 밑변 길이가 1장 5척(약 5m)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때까지 남아 있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1928년에 지역 군정(軍政) 당국이 군대 막사를 지으면서 영대의 남은 흔적을 완전히 허물어버렸다. 지역민들의 원성이 있자 링타이현 출신의 육군 사령관 양쯔헝(杨子恒, 1898∼1961)의 제안에 따라 1933년에 영대를 짓기로 결정했다. 1934년에 영대가 있었던 터에 새로 들어선 것은 높이 28척(약 9.3m), 둘레 120척(약 40m)의 2층짜리 팔괘정(八卦亭) 건물이었다. 그 안에는 문왕의 상(像)을 모셔두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건축물로서의 영대가 완공될 때 동쪽에서 두루미[丹顶鹤] 두 마리가 날아와 3일 동안 돌면서 문왕 사당의 노송(老松)에 깃들었고, 링타이현 사람들은 이를 큰 길조로 여겼다고 한다.

 

▲ 중국 간쑤성 링타이현의 고영대 (사진 출처: baike.com/wikiid/)

 

 

 그러나 이 영대도 1966년 중국에 문화대혁명의 바람이 불 때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영대가 없는 영대현(링타이현)은 있을 수 없다는 지역민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1984년부터 재건이 시작되었고, 1985년 12월 28일에 높이 36m의 북향 건축물로 다시 완성되었다. 그리고 ‘고영대(古靈臺)’라는 이름이 붙여져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35



▲ 1985년에 영대가 있었던 자리에 고영대(古靈臺)가 새로 지어진 직후의 링타이현 모습. 가운데 건물이 고영대이고, 고영대 뒤의 산이 형산이다. 『영대현지(灵台县志)』(1988) 표지에 수록된 사진 속의 이 건물은 지금도 남아있다. 


 

문왕이 득천명하기 위해 상제를 모셨던 최초의 영대인 고영대를 답사하기 위해서는 몇 년을 기다려야 했다. 2025년 1월에야 겨우 이곳을 찾았다. 1월 6일 비행기로 중국 함양국제공항에 도착한 후, 예약한 차에 탑승하여 황토 고원 지대를 서북쪽으로 꼬박 3시간 달린 끝에 링타이현에 도착했다. 고영대는 링타이현의 시내 한복판에 있었다. 해가 이미 떨어졌으므로 고영대 옆의 숙소에서 자고, 고영대가 문을 여는 시간인 아침 8시에 맞추어 방문하였다.

 

입구에는 ‘주원(周苑: 주나라의 정원)’이라는 간판이 붙은 문이 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 ‘영대(靈臺)’라고 적힌 건축물이 하나 우뚝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쌀쌀한 겨울바람을 맞으며 찬찬히 살폈다. 이 영대가 문왕이 세운 영대인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이 자리만큼은 문왕이 치성을 올려 득천명하기 위해 상제를 모셨던 제단이 있었던 곳이 맞다. 새로 지어진 고영대는 밖에서 보면 꼭대기 전각까지 총 6개의 층으로 보이는데, 실제는 3개의 층이라고 한다. 1층은 기념품 판매점과 관리실, 2층과 3층은 문왕 업적 전시관과 사무실이고, 꼭대기 옥상에는 문왕의 조각상을 모신 전각이 있어 향을 피우고 참배를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꼭대기로 오르는 영대 양옆의 기다란 회랑 벽에는 영대 재건을 기념하는 비석 200여 개를 전시해 놓았다.


  정리하자면, 문왕이 지은 영대가 천문 관측을 위한 시설이었다는 전승은 잘못 전해진 사실이다. 문왕은 견융과 밀수를 정복한 후 폭정을 일삼는 은나라를 멸하고 새로운 천자국을 세우려는 결심을 굳히고, 혁명에 정당성을 얻기 위해 천명을 받으려고 영대를 세워 상제를 모시고 치성을 올렸다. 사람들은 원래 대라는 것이 제왕의 천문 관측 시설이고, 문왕의 영대 또한 대이니 천문관측소일 것으로 여겨왔지만, 문왕이 영대를 처음 지은 이유는 그런 게 아니라 상제를 모시고 치성을 올리기 위함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문왕의 영대는 원래 신을 모시는 제단이었다. 그렇다면 대순진리회에서 상제님과 천지신명을 모시는 신전의 명칭이 영대인 것은 근거가 있는 셈이다.

 

 

 ▲ 고영대 꼭대기에는 문왕을 모신 전각이 있다. 입구에는 ‘지령인걸(地靈人傑)’이라고 적혀있다.

 

 

 신기한 것은 도전님의 훈시다. 앞서 언급했듯이, 도전님께서는 문왕이 영대를 둬서 천지신명을 모셨다가 땅에 봉했다고 하셨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영대는 천문관측소였다고 오해되었고, 중국 한 귀퉁이의 궁벽한 작은 고을 링타이현에만 영대제천의 전설이 전해졌을 뿐이다. 영대에 상제를 모시고 치성을 모셨다는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링타이현 사람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는 뜻이다. 지금도 이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 도전님께서는 어떻게 오래전에 이 사실을 다 아시고 훈시하셨을까?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3. 문왕이 풍경에 두 번째로 세운 영대 : 서주문왕영대(西周文王灵台)

 

  밀수를 정벌하고 득천명(得天命)하고자 링타이현 형산 아래에 영대를 세워 상제께 천제를 올린 문왕은 본거지인 기산으로 돌아왔다. 그는 즉위 5년에 우(邘)나라를 정벌하고, 이듬해에는 숭(崇)나라까지 멸망시켰다.36
  이제 문왕은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 도읍을 기산에서 동쪽으로 옮기고자 했다. 그가 새 도읍으로 낙점한 지역은 지금의 시안 서쪽 외곽에서 위수(渭水)로 흘러 들어가는 풍하(灃河) 주변이었다. 문왕은 풍하 서쪽에 종묘(宗廟)와 원유(園囿)37를 짓고 ‘풍경(豐京, 또는 豐邑이라고도 함)’이라 이름했다.38 그리고 문왕은 즉위 6년 만에 기산을 떠나 풍경으로 도읍을 옮겼다.

 

 

▲ 당나라 장안성 서편에 위치한 주나라 풍경과 호경. 풍경과 호경 사이로 풍하가 흐른다. 문왕은 풍경 남쪽에 영대를 세웠다. (바이두 지도)

 

 

문왕에게는 숙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밀수 지역에서 쌓았던 제단 영대를 정식으로 올리는 것이었다. 제왕은 대를 세워야 하는 법이므로, 중원으로 진출하여 은나라를 꺾고 천자가 되려 하는 문왕으로서는 이전에 흙으로만 쌓았던 영대를 제대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문왕은 풍경 남쪽에 영대를 건설하기로 했다. 그곳은 주나라의 종묘와 왕실 정원이 있는 풍경[丰镐遗址]에서 남쪽으로 9.6km 떨어진 장소였다. 문왕은 주나라 백성을 동원하여 영대를 건설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두 번째 영대의 건설 목적은 상제께서 자기에게 천명을 주신 데 대한 감사의 치성을 올리는 것, 나아가 자신이 천자로서의 권위를 하늘로부터 얻었음을 대내외에 널리 선포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영대 건설 이야기는 『시경(詩經)』 「대아(大雅)ㆍ문왕지습(文王之什)」에 등장한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經始靈臺    ‘영대(靈臺)’를 짓기 시작하여
經之營之    그것을 재고 다지니
庶民攻之    서민들이 거들어주어
不日成之    며칠 안 되어 다 이루어졌네.
經始勿亟    지을 때 서두르지 말라고 하였으나
庶民子來    서민들은 어버이 돕는 자식처럼 모여들었다네.
王在靈囿    주문왕이 ‘영유(靈囿: 영대 근처에서 동물을 기르는 동산)’ 에 오르니
麀鹿攸伏    암수 사슴이 이에 엎드리네.
麀鹿濯濯    암수 사슴은 포동포동 윤기 흐르고
白鳥翯翯    백조는 깨끗하고 하얗도다.
王在靈沼    주문왕이 ‘영소(靈沼: 영대 앞의 연못)’에 머무르니
於牣魚躍    아아, 물고기가 한가득 뛰어노네.
虡業維樅    종과 경을 매다는 틀에
賁鼓維鏞    큰 북과 큰 종이 걸려 있네.
於論鼓鍾    아! 질서 있게 종을 쳐서
於樂辟廱    아! 벽옹(辟廱: 임금이 공부하는 학궁)을 즐겁게 하네.
於論鼓鍾    아! 질서 있게 종을 쳐서
於樂辟廱    아! 벽옹을 즐겁게 하네.
鼉鼓逢逢    악어 가죽 북을 둥둥 울리며
矇瞍奏公    앞 못 보는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한다네.
39

 

  『시경』 원문에서 눈여겨봐야 할 게 ‘삼령(三靈)’이다. 삼령이란 세 개의 영(靈), 즉 ①영대(靈臺), ②영유(靈囿), ③영소(靈沼)다. 문왕은 두 번째 영대를 세울 때, 그 주변에 동물을 기르는 큰 동산과 연못도 같이 조경했다. 특히 문왕이 연못[靈沼]을 파게 했을 때 연고 없는 유골이 나오자, 버리지 않고 옷을 입혀 관에 넣고 장사를 지내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40 이렇게 상제를 모신 문왕의 두 번째 영대는 연못인 영소, 그리고 동물을 기르는 동산을 끼고 있는 대규모 건축물이었다.


  그러고 보면 대순진리회에서 상제님과 신명들을 모신 신전 영대의 앞마당에도 연못과 동산이 조경되어 있다. 문왕의 영대 주변에는 사슴과 백조, 물고기 등 여러 동물도 길러졌다는데,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에도 약간 특이하게 생긴[길조(吉鳥)를 연상시키는] 새, 즉 암컷과 수컷 한 쌍의 공작새들이 두 곳에서 각각 길러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문왕이 풍경을 건설하면서 세웠던 영대는 주나라 800년 역사 동안 유지되었다. 영대는 주나라 종교 생활의 중심으로서, 몇 번의 개축을 거듭하며 천자가 하늘에 제사하고 제후들을 초빙하거나, 천문 관측을 하는 등 여러 목적으로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41 주나라가 멸망한 뒤로 영대는 더 이상 활용되지 못하고 쇠락하였다. 그래도 영대는 진나라와 한나라를 거치면서 존속되었으며, 무려 송나라 때까지 남아 있었다. 북송의 송민구(宋敏求)가 편찬한 『장안지(長安志)』(1076)에 의하면, 당시 영대를 찾아 조사했을 때 높이 2장(약 4.6m)에 둘레 120보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고 한다.42 그리고 명나라 때 영대가 있었던 자리에 평등사(平等寺)라는 불교 사찰이 들어섰다.43 이 사찰은 지금까지 여러 번 중수(重修)를 거듭하면서 전해지고 있다. 특히 1982년에 정천법사(净天法师)가 이 사찰에서 기거를 시작하면서 2004년 입적할 때까지 절의 모습들을 쇄신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44



▲중국 시안시 서쪽 풍하 좌우에 위치한 풍경과 호경. 문왕이 두 번째로 건설한 영대 유적은 풍경에서 남쪽으로 9.6km 떨어진 사찰 평등사(平等寺) 안에 있다. 


문왕이 두 번째로 건설한 영대의 터를 답사한 것은 2024년 8월의 일이었다. 북경대에서 학회 발표를 마친 후, 기차를 타고 시안에 와서 곧바로 서쪽 외곽에 있는 평등사를 찾았다. 평등사 인근 도로 이름이 ‘영소가도(灵沼街道)’였는데, 이것은 삼령의 하나인 영소가 여기에 있었던 흔적을 보여준다. 참고로 링타이현의 영대 주변에는 삼령의 흔적이 없다. 삼령의 흔적이 발견되는 곳은 풍경 남쪽에 두 번째로 건립된 영대뿐이다. 이것은 『시경』에서 노래하는 문왕 영대가 전쟁 직후 급히 건설된 링타이현 영대가 아니라 풍경 남쪽의 대규모 건축물 영대임을 강하게 시사한다.
  평등사는 그야말로 인적이 드문 외진 곳에 있었다. 차량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길이 좁아서, 결국 차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간 끝에 겨우 입구에 닿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게 아닌가! 출입문에는 ‘하안거 기간(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동안 사찰 내 승려들이 폐관 수행하니 사찰을 개방하지 않는다’라는 공고문이 붙어 있었다. 그 옆에는 하안거 기간을 제외하고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 이틀 동안만 오전 8시에서 11시, 오후 2시 30분에서 4시 30분까지만 외부의 출입을 허용한다’라고 적혀있었다.

 

 

▲ 평등사(平等寺) 입구. 철문이 굳게 닫혀 있다.

 

 

 ▲ 평등사 경내에 있는 문왕 영대 유적 비석. 이 위로 문왕을 모신 전각이 있다.

 

 

평등사를 찾은 날은 2024년 8월 25일이었고, 음력으로 7월 22일이었다. 하안거 기간은 아니었지만, 초하루와 보름이 아니므로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멀리서 어렵게 찾아간 길이기에,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평등사의 관리인 전화번호를 알아내고 학술 조사 때문에 들른 것임을 거듭 알린 뒤에야, 다행스레 잠깐 출입을 승낙받을 수 있었다. 평등사 안에는 여승, 비구니들만 있었다. 비구니들이 엄격한 불교 수행을 하기에 일반인의 출입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명나라 때 지어진 평등사는 오래된 고찰이지만 석가불이나 미륵불을 모시는 곳이 없고, 단지 지장전과 관음전만 두었다. 그 대신에, 문왕 영대의 터를 지켜온 만큼 문왕을 모신 전각[文王閣]을 핵심 건물로 삼고 있었다. 이 문왕각은 훼손이 심한 상태였다가, 2006년 9월에 새로 복원이 완료되었다고 한다. 이 전각은 높이 2.7m, 너비 12m, 길이 12.1m의 청석 벽돌로 만든 넓은 기반 위에 16개의 계단을 두고 있다.45 문왕 전각 안에는 문왕의 상(像)을 놓아 참배할 수 있게 하였고, 전각 내부에는 문왕의 일대기를 벽화로 그려두었다. 그리고 전각 앞에는 문왕이 세웠던 영대가 이곳에 있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하나 서 있었다. 현재 평등사에서는 매년 정월 20일이 되면 문왕을 기리는 예불 행사를 벌인다고 한다.

 

 

▲ 문왕 전각 내부에는 문왕의 상(像)이 있다

 

 

4. 강태공과 봉신대(封神臺), 지존(地尊)과 인존(人尊)

 

  풍경을 새 도읍으로 삼고 영대까지 세운 문왕은 강태공의 도움을 받으면서 동쪽 지역으로 세력을 넓혀 나갔다. 즉위 50년째인 97세가 되어 문왕은 생을 마감했다. 그때 통치 영역은 당시 중국의 ⅔로서 천하의 판세를 이미 뒤집은 상황이었다.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이가 문왕의 아들 희발(姬發), 즉 무왕(武王)이었다. 무왕은 즉위 4년 만에 강태공을 앞세워 은나라의 당시 도읍 조가(朝歌)로 진격하고 목야(牧野)46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은나라는 멸망하고 주나라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전쟁 종료 후 강태공이 봉신(封神)을 했다고 한다. 그 내용을 담은 게 앞서 언급한 신마소설(神魔小說) 『봉신연의』다. 그 핵심만 언급하자면, 강태공은 스승 원시천존(元始天尊)의 명을 받아 봉신대(封神臺)를 건설했다. 강태공은 고된 노력 끝에 목야 전투를 마지막으로 은나라를 물리치고 대업을 성취했다. 은나라와 주나라를 둘러싼 전쟁에 등장하는 신선들과 장수들은 대략 400명 정도였고 전투에서 희생된 숫자는 365명이었다. 이 365명의 혼백은 죽음을 맞이하는 족족 봉신대로 모여들었고, 강태공은 원시천존의 명에 따라 이들에게 재물신(財物神), 토지신(土地神), 조왕신(竈王神) 등의 지위를 내리고 각 지역의 신들로 봉했다.47


  지금 중국에는 바오지시(宝鸡市) 푸펑현(扶风县)의 예하산(野河山) 정상에 봉신대 유적이 있다. 그곳은 링타이현 영대에서 동남쪽으로 약 65km, 기산에서 동북쪽으로 약 28km 떨어진 지점이다. 직접 가서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2025년 1월 7일 링타이현의 영대 답사를 마친 후 그곳으로 곧장 향했다. 두 시간 차를 달려 예하산 아래에 도착했는데, 겨울이어서 산불 예방 이유로 폐쇄되어 있었다. 삼림 관리가 엄하여 출입할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출입구에서 사진만 찍어야 했다.
  봉신대 유적은 예하산 정상에 관광지로 조성되어 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예하산 아래에서 그곳까지 오르는데 계단이 808개다. 중국에서는 숫자 ‘8’을 길운과 재물의 상징으로 여기므로, 그것을 이용하여 계단 수를 만들었다고 한다. 계단을 오르는 길 양옆에는 『봉신연의』에 등장하는 봉신된 장수와 신선들이 108명 늘어서 있다.48 오늘날 소설 『봉신연의』는 영화나 만화, 애니메이션 등 문화콘텐츠로 많이 생산ㆍ소비되기 때문에 이것을 상품화하여 조성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아무런 연고 없이 이 지역에 그냥 봉신대가 세워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료를 더 찾아보니, 문화대혁명으로 파괴되기 이전의 예하산 주변 지역에 많은 사찰들이 있었고, 그 사찰들은 『봉신연의』에 등장하는 여러 신들을 모시고 있었다고 한다.49 봉신대를 만들만한 나름의 근거를 말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봉신대가 ‘반드시’ 예하산 정상에 있었던 건 아니다.

 

 

▲ 예하산 봉신대 유적의 위치. 문왕의 본향인 기산의 옆쪽이자, 최초로 지어진 링타이현의 영대 아래쪽에 있다. 주소는 ‘陕西野河山生态旅游景区’.

 

이 지점에서, 봉신을 한 주인공이 강태공이 아니라 문왕이었다는 이야기를 해야겠다. 『봉신연의』에서 강태공이 봉신대를 지어 각 지역에 신을 봉안할[封神] 때는 문왕이 세상을 뜬 후였다. 문왕은 강태공의 봉신 장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봉신연의』는 신들을 봉한 장본인과 장소가 문왕ㆍ영대가 아니라 강태공ㆍ봉신대라고 말한다. 앞서 서술했듯이, 도전님께서는 문왕이 영대를 두어 천지신명을 모셨다가 땅에다 봉신하였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봉신의 주인공은 강태공이 아닌 문왕이다.

 강태공이 문왕의 봉신에 큰 역할을 했던 것은 인정된다. 주지하듯이 강태공은 낚시하던 조어대(釣魚臺)에서 문왕을 만나 등용되었다. 그리고 문왕의 스승[太師]으로서 견융과 밀수 정벌에 조력하며 대업의 기초를 닦았다. 그는 문왕 사후 무왕으로 하여금 은나라를 꺾고 주나라가 중원의 주인이 되게 만들었다.50 문왕과 무왕의 업적에 핵심 역할을 했던 그가 천명을 얻기 위한 문왕의 영대 건설과 봉신이라는 중대한 일에 관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 예하산 모습과 봉신대로 오르는 계단. 관광지로 조성된 곳으로 실제 봉신을 했던 장소는 아니다.

 

 

강태공이 봉신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봉신연의』도 완전한 허구는 아니다. 이 소설은 창작된 이야기지만 역사를 풀어서 쓴 ‘연의(演義)’ 형식인 데다가, ‘무왕벌주평화(武王伐紂平話: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정벌하는 구전 이야기)’라는 민간 설화를 문헌으로 옮김으로써 민간의 전승된 인식을 담아내고 있다. 이것을 고려하면, 강태공은 문왕이 영대를 건설하고 봉신할 때 핵심 참모이자 조력자로서 그 과업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 예하산 정상에 조성된 봉신대 모습 (trip.com)

  

  이제 시간순으로 흐름을 정리해 보자. 문왕은 강태공을 조어대에서 등용함으로써 대업 성취의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강태공과 더불어 즉위 3년 만에 견융과 밀수를 정벌했다. 그 직후 밀수 지역의 링타이현 형산 아래에 흙으로 영대를 쌓아 상제를 모시는 제단을 만들고, 천하를 다스릴 자격을 천명으로 얻기 위해 치성을 올렸다. 즉위 6년에는 기산에서 시안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도읍 풍경을 건설했고, 풍경 아래에 영대를 다시 두었다. 그 영대 앞에는 연못[靈沼]과 동물을 키우는 동산[靈囿]도 조성했다. 문왕은 이곳을 거점으로 삼고 동쪽으로 세력을 넓혀 나가다가 즉위 50년에 운명하였다. 도전님의 훈시대로라면 문왕은 즉위 6년에서 즉위 50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영대에 모셔져 있던 신들을 땅의 모처에 봉안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봉어지(神封於地)였고, 이로써 지존(地尊)의 시대가 되었다. 문왕의 최측근이자 핵심 참모였던 강태공은 문왕을 도와 이 모든 업적을 함께 이루었다.

 

 

▲ 강태공과 문왕이 만났던 조어대. 이곳은 바오지시[宝鸡市] 동▼ 남쪽 외곽의 위수(渭水) 지류에 있으며, 현재 ‘姜子牙钓鱼台风▼ 景名胜区’로 알려져 있다.

 

 

도전님께서는 이제 신명을 모신 데가 도장이라고 하셨다. 구체적으로는 도장의 핵심인 영대다. 영대는 원래 상제를 모시던 곳이었으므로, 상제님을 모시는 대순진리회 신전의 명칭이 영대인 것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 도전님께서는 대순진리회 영대에 모셔진 천지신명들은 앞으로 사람에게 봉해지며, 이것으로써 인존(人尊)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고 하셨다. 주지하듯이 대순진리회에서 영대를 처음 봉안한 분은 도주님이셨다. 도주님께서는 1909년에 봉천명(奉天命)하시고 1925년에 도장을 짓고 상제님을 봉안한 영대를 설립하셨다. 처음에 영대에는 상제님만 모셔져 있었으나, 대략 1957년 무렵에는 15신위로 대표되는 신들이 영대에 모두 봉안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문왕이 득천명(得天命)하려 영대를 세우고 상제와 천지신명을 모셨다가 그 후에 천지신명을 땅에 봉했다면[神封於地의 地尊], 도주님께서는 봉천명(奉天命)하시고 상제님과 천지신명을 영대에 모셨으며 그 후에 천지신명은 다시 인간에게 봉해진다[神封於人의 人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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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이 글은 『대순사상논총』 44호(2023)에 실렸던 「물질종교 관점에서 본 영대: 물질 영대와 비물질 영대 가로지르기」의 내용 일부를 발췌하여 보강한 것이다.
02 “우리 도장은 영대를 봉안하였으니 지상의 옥경(玉京)으로 도통진경의 성전(聖殿)입니다. 그러니 이 성역(聖域) 내에서는 성ㆍ경ㆍ신의 극치가 되어야 합니다.” 1985. 5. 17 (陰3. 28) 도전님 훈시. 《대순회보》 268 (2023), p.9; 대순진리회 교무부, 『대순지침』 2판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12), pp.81-82.
03 「도전님 훈시」 (1992. 3. 18).
04 「도전님 훈시」 (1993. 4. 27).
05 “姬昌”, https://baike.baidu.com
06 여주본부도장 포정문에 새겨진 글 가운데 “창생을 광제(廣濟)하시는 분이 수천백 년 만에 일차식(一次式) 내세(來世)하시나니, 예컨대 제왕으로서 내세하신 분은 복희 단군 문왕이시오.”라는 내용이 있다.
07 灵台县志编纂委员会, 『灵台县志』 (岐山: 西岐山印刷厂, 1988).
08 국가유산청 홈페이지(https://www.heritage.go.kr).
09 선왕들이 대(臺)나 사(榭)를 지을 적에, 사(榭)는 군대를 강무(講武)할 정도의 크기를 넘지 아니하였고, 대(臺)는 국가의 요사스러운 기나 상서로운 기를 살피는 정도의 높이를 넘지 아니하였다. 先王之爲臺榭也, 榭不過講軍實, 臺不過望氛祥. 故榭度於大卒之居, 臺度於臨觀之高. 『國語』 卷十七 「楚語上」.
10 전근대 한국은 대를 세워 천문을 관측하는 데 상당한 고충을 겪었다. 독자적으로 천의를 살핀다는 것은 천자국임을 자처하는 이웃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11 刘次沅ㆍ张铭洽, 「陕西关中古代天文遗存」, 『陕西天文台台刊』 (1992年第2期), 第112页.
12 夫天文地理, 人情之效存於心, 則聖智之府. 是故古者聖王既臨天下, 必變四時, 定律歷, 考天文, 揆時變, 登靈臺以望氣氛. 『說苑』 卷十八 「辨物」.
13 『봉신방(封神榜)』, 『상주열국전전(商周列國全傳)』, 『무왕벌주외사(武王伐紂外史)』, 『봉신전(封神傳)』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14 造此靈臺, 以應災祥之兆. 『封神演義』 第二十二回 「西伯侯文王吐子九十九回」.
15 因見邇來災異頻仍, 水潦失度, 及查本土, 占驗災祥, 竟無壇址. 昨觀城西有官地一隅, 欲造一臺, 名曰靈臺, 以占風候, 看驗民災. 『封神演義』 第二十三回 「文王夜夢飛熊兆」.
16 정약용, 『역주 시경강의 4』, 실시학사 경학연구회 번역 (서울: 도서출판 사암, 2008), pp.479-483.
17 『예기(禮記)』 「곡례하(曲禮下)」에 “天子之五官, 曰司徒, 司馬, 司空, 司士, 司寇.”라고 하였다. 오관(五官)이란 중국 고대 국가 통치 체제의 다섯 가지 주요 관직으로서, 곧 사도(司徒: 백성 교육 담당), 사마(司馬: 군사와 국방 담당), 사공(司空: 공공 토목과 건축 담당), 사사(司士: 관리 임명과 감찰 담당), 사구(司寇: 법률과 치안 담당)를 의미한다.
18 『서경(書經』 「홍범(洪範)」에 “五事, 一曰貌, 二曰言, 三曰視, 四曰聽, 五曰思.”라고 하였다. 오사(五事)는 다섯 가지의 기본적인 실천 항목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체의 오장(五臟)과 관련한 5개의 감각기관인 귀(耳), 눈(目), 코(鼻), 입술(唇), 혀(舌)와 그 작용으로서, 곧 모(貌: 정중한 태도), 언(言: 신중하고 정직한 언행), 시(視: 밝고 공정하게 살피는 시선), 청(聽: 공정하고 고른 의견 청취), 사(思: 신중하고 깊은 생각과 결정)이다. ‘오사를 질서 있게 했다’라는 말의 의미는 군주가 실천해야 할 다섯 가지 기본 덕목을 정했다는 뜻이다.
19 한국에서 김소월, 김동인 등이 주축이 되어 간행한 순수 문예 잡지 《영대》는 1924년 8월 창간되어 통권 5호(1925년)까지 출판되었다.
20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漢韓大辭典』 14 (서울: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8), p.1270.
21 『灵台县志』, p.276.
22 링타이현 지방사지 편찬 사무실[灵台县地方史志办公室]의 주임.
23 张新民, 「西伯侯灵台祭天」, 田志义(编), 『灵台史话』 (甘肃: 甘肃文化出版社, 2007), pp.28-30.
24 “文王.” https://baike.baidu.com.
25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허비시(鹤壁市) 신구(新区) 남부의 녹대 유적[鹿台遗址]과 그 인근.
26 “문왕은 유리(羑里)에서 三百八十四효를 지었고….” 『전경』 예시 21절.
27 “文王.” https://baike.baidu.com.
28 “文王.” https://baike.baidu.com.
29 “文王.” https://baike.baidu.com.
30 张新民, 앞의 글, pp.28-30.
31 공자는 은나라가 하나라의 예법을 따랐고, 주나라는 은나라의 예법을 따랐다고 말했다. 子曰, 殷因於夏禮, 所損益, 可知也. 周因於殷禮, 所損益, 可知也. 『論語』 「爲政」.
32 『詩經』 「大雅ㆍ文王之什」, ‘文王’.
33 『詩經』 「大雅ㆍ文王之什」, ‘大明’.
34 『詩經』 「大雅ㆍ文王之什」, ‘皇矣’.
35 『灵台县志』, p.276.
36 “文王.” https://baike.baidu.com.
37 큰 규모의 왕실 정원. 주위에 담장을 두르고 여러 정자와 누각을 두며, 돌과 나무로 조경하고, 새와 짐승을 기르기도 한다.
38 문왕 사후 즉위한 무왕(武王)은 풍하 동쪽에 국왕이 거주하며 정사를 보는 궁궐을 설치하고 ‘호경(鎬京)’이라 불렀다. 문왕이 풍하 서쪽에 세운 풍경, 무왕이 풍하 동쪽에 세운 호경을 합쳐서 ‘풍호(豐鎬)’라고 한다. 풍호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사각형 모양으로 건설된 체계적인 도시이며, 이후 등장한 중국 국가들의 도읍지 모델이 되었다. 이 도시는 서주(西周)의 수도로 약 300년 동안 사용되었으며, 종주(宗周)라고도 불린다. “丰镐.” https://baike.baidu.com.
39 『詩經』 「大雅ㆍ文王之什」, ‘靈臺’.
40 문왕이 영대(靈臺)를 짓다가 연못[靈沼]도 파게 되었는데 죽은 자의 유골이 나오자 다시 묻어 주어라[更葬之]고 했지만, 관리가 주인이 없는 유골이므로 버려도 된다고 답했다. 문왕이 그에 반대하면서 “천하가 있으면 천하의 주인이 있고, 한 나라가 있으면 한 나라의 주인이 있다. 내가 바로 그 주인이다.” 하면서 묻어주도록 명령을 내리자, 관리는 그 명에 따라 시신에 옷을 입히고 관에 넣어 묻었다. 이 소식을 들은 천하의 사람들은 문왕의 어진 마음에 감격했다고 한다. 周文王作靈台及爲池沼, 掘地得死人之骨, 吏以聞于文王. 文王曰:更葬之. 吏曰:此無主矣. 文王曰:有天下者, 天下之主也; 有一國者, 一國之主也. 寡人固其主, 又安求主. 遂令吏以衣棺更葬之. 天下聞之, 皆曰:文王賢矣, 澤及枯骨, 又況於人乎. 或得寶以危國, 文王得朽骨, 以喻其意, 而天下歸心焉. 『新序』 「雜事第五篇」.
41 刘次沅ㆍ张铭洽, 앞의 글, 第112页.
42 今案䑓髙二丈, 周圍百二十歩. 『長安志』 卷三.
43 刘次沅ㆍ张铭洽, 앞의 글, 第112页; 평등사가 당나라 때 영대 터에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북송의 송민구가 영대의 유적을 찾아 조사했다는 기록을 남겼음을 고려하면, 평등사는 북송 이전에는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44 https://baijiahao.baidu.com/s?id=1761484106129679630&wfr=spider&for=pc.
45 https://baijiahao.baidu.com/s?id=1761484106129679630&wfr=spider&for=pc.
46 현재의 허난성(河南省) 신샹시(新乡市) 지역. ‘목야고전장(牧野古战场)’으로 알려져 있다.
47 『封神演義』 第九十九回 「姜子牙歸國封神」.
48 “探秘野河山 |封神台.” mp.weixin.qq.com.
49 “封神台.” https://baike.baidu.com.
50 “姜太公.” https://baike.baidu.com.

 

 

 


천상 (선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