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때 법전 [경국대전]11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도류(道流) 금단(禁壇)은 암송, 영보경(靈寶經)은 독법, 연
생경(延生經), 태일경(太一經), 옥추경, 진무경(眞武經), 용왕경(龍王經) 가운데에서 3경은 뜻 해석을 한다.12
위의 글은 소격서 관리를 뽑기 위한 도류 시험에 관한 내용인데
정5품부터 종9품의 문관을 뽑았다고 한다.13 이 내용은 조선 초에 [옥추경]이 제도권 특히 조선 왕조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았는
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조실록]에 등장하는 ‘뇌성보화천존’에
대한 다음의 기록을 몇 가지 살펴보면 [옥추경]을 소의 경전으로
하는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신앙의 제도권내의 위상을 더욱 잘 알
수 있다.
비를 비는 방법이 비록 많으나 뇌성보화천존에게 비는 것이 절실하오니14
뇌성보화천존에게 기우하는 초제를 행하였다15
또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에 초제를 지내고16
서거정(徐居正:1420-1488)이 성종 임금을 대신해서 적은 [昭格署雷聲普化天尊祈雨靑詞]에 … 농사하는 것은 나라의 근본이라. 한 가지는 곡식만 익지 않아도 흉년이요. 밥은 백
성의 하늘이 되는지라. 사흘만 먹지 않으면 목숨이 끊어지거
늘 지금 동작의 철을 잃었으니 어떻게 다시 서성을 바라리
오. … 정이 가슴 속에 격동하매 오직 명령은 상제의 마음에
있사옵니다. … 이 초사는 임금의 입장에서 ‘구천응원’뇌성보
화천존에게 올리는 글이다.17
위의 3가지 글은 ‘뇌성보화천존18’과 ‘기우제’에 관한 글이다.
동양의 고대 국가에서 농사는 백성들의 생명이고, 이는 임금의 덕
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임금과 신하들은 백성들이 농
사를 잘 지어 풍년이 들게 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다. 그
래서 오죽하면 태종이 기우제를 통하여 죽으면서 내린 비를 ‘태종
우(太宗雨)’라 하고 1996년 대하드라마에서 ‘용의 눈물’이란 제목
으로 상영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나라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기우제에서 비를 청하기 위해 비는 대상이 그 많은 신들 중에서도
‘뇌성보화천존’이었다는 점은 당시의 제도권에서 ‘뇌성보화천존‘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조선 초의 제도권 도교에서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과 [옥추경] 이 차지하는 위상이 주류적이었음에도 1996년 김승동(金勝東)이
펴낸 [도교사상사전(道敎思想辭典)]은 [옥추경]은 첫째 도가의 위
서(僞書), 둘째 도교에 가탁(假託)하여 꾸며 낸 것, 셋째 중국 본래
의 도교 경전에는 없는 것, 넷째 후인이 조작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19
하지만 이것은 실록의 기록만으로도 사실과 다름을 알 수 있다. 원인은 이 글이 단순히 조선 후기 및 20세기 초의 시각
을 인용하여 정리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인의 근원지를 찾아서 거슬러 올라가보면 [조선도교사]의 저자인 이능화20를 만나게
된다.
이능화는 1839년에 탈고하여 완성한 이규경21의 저서 [오주연
문장전산고]22를 인용하여 [옥추경]을 도가의 ‘위서(僞書)’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능화는 [옥추경]이 ‘위서’라는 학문적인
근거를 제시하였는가? [조선도교사]에서 위서라는 근거를 설명하고 있지만23 본인의 견해를 밝힌 구절은 한 구절에 불과하며24, 그 구절조차도 타당한 근거로 제시하였다고 보기에는 어렵다고 판단된다. 단지 왕세정의 견해에 찬동한다는 내용이 전부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능화나 김승동이 학문적인 천
착(穿鑿)을 통하여 [옥추경]을 언급한 것이 아님을 볼 때 그들의
평가는 단순 인용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학문
적인 관점에서 조선에서의 [옥추경]에 대한 위서론의 시작은 이규
경의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옥추경]에 관한 분석이 전혀 없다. 이것은 이규경이 학문적 천착을 통하여 [옥추경]에 대한 견해를
밝힌 것이 아니라25, 단지 중국 명나라 왕세정(1526-1590)의 말을 가져와 위서론을 제기하였음을 알려준다.
결국 문헌적인 검토를 해 보면 조선 후기부터 시작된 [옥추경] 위서론은 이규경이 1839년 탈고한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출발
하여 점차적으로 번져갔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옥추경]에 대한 잘못된 오인이 학자들에 의해서만 비롯되었다고 생각하
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옥추경]이 ‘위서’로 오해 받은 60여 년 이
전부터 ‘역적서’로 취급당해왔다는 역사적 자취가 있기 때문이다. 즉 영조(재위1724-1776) 시절에 [옥추경]을 집에 두었다는 것만으로도 ‘역적’으로 몰릴 지경이었고, 조선 후기사회가 되면 ‘좌서
(左書)’로 묶이기까지 하였다고 한다26. 다시 말하면 1839년 이전
에 실학자 이규경이 [옥추경]을 위서로 몰고 갈 명분이 될 만한
정치․사회적인 여건이 있었다는 것이다.
전제 군주 정치하에 있었던 조선과 중국에서 군주의 행보가 사회
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옥추경]과 연관된 정치․
사회적인 면을 살펴보는 것은 [옥추경]에 대한 제도권의 인식 변화
와 이해에 중요한 부분이다. [옥추경]이 제도권에서 비판적으로 인
식되게 된 정치․사회적 배경과 관련된 실마리는 영조 46년(1770)
에 완성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문헌비고]: 영조21년(1745)에 임금의 특명으로 맹제(盲
祭), 독경제(讀經祭), 맹인기우제(盲人祈雨祭), 무녀기우제(巫
女祈雨祭)및 임금의 거처를 옮길 때의 맹인 독경제를 모두
폐지하라 하였다.27
위의 1745년의 사건 기록은 맹인에 대한 이야기만 있고, [옥추경]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기록은 전혀 없다. 그러나 다음의 [조선
도교사] ‘제22장 도교와 맹인(盲人)의 관계’를 본다면 위의 사건이 [옥추경]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이수광(李晬光)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는 「우리나라 사
람을 중국사람이 따르지 못할 것이 있으니 말하자면 맹인도
점을 치는 것이다.」 라고 하였고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
(筆苑雜記)]에서는 「맹인이 복을 빌고 도액(度厄)하는 것은
옛 사람에게서도 볼 수 없었고 중국에서도 행한 일이 없었다
」라는 말과 [이조실록]에 맹승과 관련된 기록이 너무나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보았을 때 조선에서의 맹인에 대한 배려가 큰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중국에서 볼 수 없는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나라에서 설정한 맹승(盲僧), 또는
도류승(道流僧)이라고 불리는 맹승단체가 있었다. 맹승의 칭호는 선사(禪師)라고도 하였으며 나라에서는 맹승으로 하여
금 나라에 가뭄이 있으면 비를 오게 기도하게 하고, 질병이
번지면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고, 또는 맹인으로
하여금 독경(讀經)과 축수(祝壽)도 하게 하였다. 이렇게 나라
의 옹호를 받는 맹승들이 읽는 경은 불가나 도가의 경이었
다. 그렇지만 ‘맹승들은 [천수경(千手經)]이나 [팔양경(八陽
經)]은 간간히 외우기는 하나 전적으로 외우지 않고 전문적으로 읽는 경은 [옥추경] 뿐이다.’
조선 영조21년(1745)까지 국가로부터 우대를 받는 맹승들이 ‘전
문적으로 읽는 경은 옥추경 뿐이다’라는 글에서 맹승들의 사회
적인 대우가 [옥추경]의 위상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
다. 여기서 한 가지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 즉 영조 시대에 맹
승들이 영험을 빙자한 사회적인 해악을 발생시켰다면 그에 대한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은 [옥추경]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맹
승들이 끼친 해악이 영조 때 가장 많이 나타나서 영조는 맹인에
대한 일을 모두 폐지하고, 맹인이 가장 애용한 [옥추경]을 ‘역적
서’로 몰아가서는, 정조 때 자연히 [옥추경]을 ‘좌서’로 묶었다는
추론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추론은 그 근거가 미흡하고 비약이 심하다고 판단된다.
그 이유는 [이조실록] 영조21년(1745)의 기록에서 맹인에 대한
관련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고, 영조21년 이전에 맹인들이 사회에
끼친 해악에 대한 사례 또한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조실록]에 나타난 다음의 내용은 맹인들로 인한 ‘좌서화’에 대한
근거를 더욱 더 희박(稀薄)하게 한다.
임술년(1742) 4월 정미(18)일. 장령 리봉령이 글을 올려
전염병의 재변에 대하여 극력 말하고 전염병귀신에게 제사지
내는 의식을 거행하자고 청하였다. 그 의견을 따랐다.28
임술년(1742) 7월 정축(20)일. 임금이 말하기를 “나라에서 소중한 것은 종묘와 사직인데 내가 제사를 지내지 못한 것이
이미 3년이나 된다. 어떻게 귀신을 감격시킬 수 있겠는가. 절대로 다른 사람을 대행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29
임술년(1742) 8월 무자(2)일. 임금이 말하기를 “음악이란
귀신을 감동시키는 것인데 지금의 아악이 이와 같은 형편이
니 마땅히 그들이 태만한 것을 경계해야 하겠다.”30
위의 내용은 영조의 귀신관을 볼 수 있는 기록이다. 이와 같이 영
조가 귀신을 중요시하는데 맹인들의 사회적 폐해로 인하여 [옥추경] 이 ‘역적서’로 전락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다른 단서인 ‘역적서’란 표현으로 이를 추론해 보자.
‘역적서’란 표현으로 추론되어 지는 것은 [옥추경]이 정치적인 사건과 깊은 관련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조실록]에서 [옥추경]이
‘역적서’라고 규정한 내용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유추할 수 있는 기
록은 찾을 수가 있다.
계미년(1763) 9월 임오(28)일: 양조에게 문서가운데 있는
이상야릇한 글과 이단적인 글에 대하여 신문하니 공술하기를 “신은 물욕을 없애려고 늘 염불을 하는 것이지 간사한 마음
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와 광철 등 여러 역적과 사돈을
맺은 일에 대해서는 속으로 늘 한스럽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역적 지가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도 편지를 주고받는 일
은 없었습니다. [옥추경]은 여직 읽은 일이 없으며 주인이
기도를 하기 위해서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문하면서 신문하
였으나 자복하지 않았다.31
위의 글은 [이조실록]에서 [옥추경]이 처음으로 정치적인 사건
에 연루되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즉 [옥추경]이 ‘역적서’로 취
급되어져서 문책 받는 내용인 것이다. 따라서 [옥추경]의 ‘좌서화’ 시작은 영조39년(1763) 9월 이전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전의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사도세자와 관련된
것인데 이와 관련된 자세한 기록은 [이조실록]에서 삭제32하여
남기지 않았으므로 연구에 어려움이 따르지만 다행이 정조(1752-
1800)의 어머니이며 사도세자(1735-1762)의 빈인 혜경궁 홍씨(1
735-1815)가 순조5년(71세,1805) 적은 [한중록] 2권, 3권에서
그 근거를 찾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런 근거를 통해 언제부터 [옥추경]이 ‘역적서’로 오인되었는지를 추론 할 수가 있다.
영조28(1752)년, 사도세자 18세, 정조가 태어난 해 섣달
(음력12월) 15일에서 수 일후: … 경모궁(사도세자)이 병이
나지 않았을 때에는 어질고 효성스러움이 극진하여 그 거룩
함이 미진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병이 나면 곧 딴사람으로
변하였으니 어찌 이상하고 서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경모궁
은 매일 경문(經文)과 잡설(雜說)을 지나치게 보았다. “[옥추경]을 읽고 공부하면 귀신을 부린다고 하니 읽어보자.” 경모
궁은 밤이면 [옥추경]을 읽고 공부하였다. 과연 늦은 밤에
정신이 어두워져서 “뇌성보화천존(雷聲普化天尊)이 보인다.”
고 말하며 무서워하였다. 그 뒤로 병환이 깊이 드니 원통하고 서러울 뿐이다. 10여 세부터 병이 생겨 음식 잡숫기와
행동하는 것이 다 예사롭지 않았다. [옥추경] 이후로는 아주
딴사람이 된 듯 무서워하고, ‘옥추’ 두 글자를 보지 못하고
단오에 먹는 옥추단도 먹지 못하였다. 또 옥추단이 들어가도
무서워하시기에 차지 못하였다. 그 후에는 하늘을 매우 무서
워하여 우레 ‘뢰(雷)’, 벽력 ‘벽(霹)’과 같은 글자를 보지 못
하였다. 예전에는 천둥을 싫어는 하였지만 그리 심하지는 않
았다. 그러나 [옥추경]을 읽은 후에는 천둥이 치면 귀를 막
고 엎드려 다 그친 후에나 일어났다. 이런 경모궁의 모습을
부왕과 모친이 아실까 싶어 모든 일이 두렵고 걱정스러웠다. 지금 그 일을 형용하지 못하겠다. 임신(1752)년 겨울에 그 병이 생겼으며, 계유(1753)년 경계증(驚悸症)을 치렀다. 갑
술(1754)년에도 그 병이 때때로 나 점점 고질병이 되었으
니, 그저 [옥추경]이 원수였다. … 33
위의 기록에 의하면 사도세자의 병은 10여 세부터 시작하였다
고 하니 아마도 혜경궁 홍씨는 11세(1745)부터 남편으로 인한 가
슴앓이를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정황에서 1752년(홍씨
18세) [옥추경]으로 인한 병이 구체적으로 언급된 것으로 보아 홍
씨는 사도세자가 승하한 해(1762,홍씨 28세)까지 10여 년 동안
겪은 그 마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 당시 사도세자가 가진 병의 원인을 부왕 영조에게 두고서 그를
원망할 수도 없을 것이고, 남편이자 다음 왕위 계승자인 사도세자
를 원망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홍씨는 사도세자의 병이 [옥추경] 을 읽음으로써 생긴 것이라 보았고 따라서 [옥추경]을 ‘원수’라고
말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음 왕위계승자인 세자에게 [옥추경]으로 인한 병이 생겼으니
엄청난 정치적 사건에 [옥추경]이 연루된 것이다. 그렇다면 [옥추
경]이 1752년(사도세자 18세)부터 정치적 문제로 비화(飛禍)하여
‘역적서’가 되었는가? 그렇게는 판단되지는 않는다. 다음의 기록을
통해 그 근거를 찾아 볼 수가 있다.
<표 1> 혜경궁 홍씨 지음, 이선형 옮김, [한중록]
페이지 | 년도와 날짜 | 내용 |
P.130 | 1755(영조31)년 사도세자 21세 | 소조의 병이 이상한 것을 자모도 자세히 모르시고 부왕께서도 자세히 알지 못하였다. |
P.149 | 1757년 | 정축년부터 의대병(衣襨病)이 나니 그 말이야 어찌 다하겠는가. |
P.150 | 1757년 6월 | 정축년 6월부터 경모궁의 화병이 더하여 사람을 죽이기 시작하였다. |
P.162 | 1758년 2월 27일 | 그 무슨 병환인가? 천백 가지 병 가운데 옷 입기 어려운 병은 자고로 없는 병이다. 어찌하여 지존하신 동궁께서 이런 병이 드셨는지 하늘을 불러도 알 길이 없었다. |
P.177 | 1761년 정월 | 신사년 정월에 의대병이 나서 그것(총애하던 현주 어미 빙애)을 죽도록 친 후에 나가셨다. … 대조(영조)께서 언제 들어오실지 몰라 그 시체를 잠시도 둘 수 없어 그 밤을 간신히 새우고 보냈다. |
P.208 | 1762년 윤5월 13일 | 소조의 병환을 모르시고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자 한들 어찌 생무명 거상(居喪:상복)을 입었느냐?”하시며 크게 꾸짖으셨다. |
P.201 | 1762년 사도세자 28세 | 임오년 윤5월 13일 신시, 사도세자 뒤주에 들어감. |
P.209 | 1762년 윤5월 21일 | 소조(사도세자)의 병환은 모르시고 다만 모두 소조께서 불효한 탓만 하셨다. 지극히 원통하고 원통할 뿐이다. 사도세자 승하 |
[한중록]에서 보면 세자빈 홍씨는 사도세자의 병을 영조에게 알
리지 않았으며, 발각되지 않게 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표1>에서 볼 수 있듯이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는 그 날
까지 병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762년 윤5월 13일까지는 병이 공론화 되지 않았으니 [옥추경]이 ‘역적서’로
비화될 일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옥추경]의 수난은 사
도세자가 승하한 날(1762년 윤5월 21일) 이후부터라고 봐야 될
것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누가 져야 되는가? 어느
누구도 그 책임을 지지 못한다면 사도세자를 죽게 한 ‘역적’ [옥추경]이 져야만 될 것이다. 혜경궁 홍씨를 아낀 영조가 [옥추경]에
대한 홍씨의 한을 부정하였을까? 또 11세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
격하였고,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지극한 정조가 [옥추경]에 대한
어머니의 한을 부정하였을까? 그 당시 정치적이든 아니면 의도적
이든지 간에 [옥추경]은 그 책임을 회피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책임을 져야만 했던 [옥추경]은 당연히 ‘역적서’되고, 또한
‘좌서’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앞서 언급한 옥추경과
관련된 정치적 사건이 사도세자가 죽은 일 년 후 영조39년(1763)
9월 28일에 나타나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정치적인 부담을 짊어지게 된 [옥추경]과 ‘구천응원뇌성
보화천존’ 신앙은 실학이 정치와 생활 속에 점점 더 그 영역을 넓
혀가고 있는 시대적인 조류를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인 흐
름에서 ‘뇌성보화천존’에게 빌어서 비를 오게 하는 국가적 ‘기우제
의 경(經)’으로, 신선이 되기 위한 ‘수련의 경’이나 혹은 ‘선(善)’을
권장하는 ‘권선의 경’으로, 뇌법 등의 술법을 행하는 ‘술법의 경’
그리고 화액을 막고 귀신을 녹여서 병을 치료하는 ‘치병의 경’으로
까지 존중 받았던 [옥추경]은 ‘좌서’라는 오명(汚名)에다 실학자
이규경에 의해 위서(僞書)라는 오명까지 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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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경국대전(經國大典)]: 세조(재위1455-1468) 때 최항 등이 시작하여 성종2년(1
471)에 완성되어 반포되고 성종 16년(1485)에 간행됨. 구중회, 앞의 책, p.153.
12) [경국대전] 권지3 예전 취재조. 같은 책, p.153.
13) 성현 [용재총화] 권지 이전(吏典), 경관직조(京官職條)에 ‘소격서는 삼청성진초제
(三淸星辰醮祭)를 담당했는데 관리는 정5품의 영(令) 1명, 정6품과 종 6품의 별제
(別提)가 각각 1명, 종9품의 참봉(參奉)이 2명이 있었다.’ 같은 책, pp.154-155.
14) [세종실록] 9년(1427) 6월 11일 조목, 같은 책, p.147.
15) [세종실록] 25년(1443) 7월 6일 조목, 같은 책, p.148.
16) 단종(1441-1457, 재위 1452-1455) 3년 5월 19일 기록, 같은 책, p.149.
17) 같은 책, pp.151-152.
18) 세 단어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 구천보화천존, 뇌성보화천존)의 설명은 ‘옥추경’ 과 관련됨을 알 것이다. 이들 단어 이외에도 ‘구천(九天)’ ‘구천응원(九天應元)’ 등
이 보인다. ‘구천’을 설명하는 전거로 이 사전은 1)[초사(楚辭)] 「이소(離騷)」, 2) [영보동현자연구천생신장경(靈寶洞玄自然九天生神章經)], 3) [사기(史記)] 「봉선
서(封禪書)」, 4) [영보필법(靈寶畢法)], 5) [옥추보경집주] 등을 들고 있다. ‘구천
응원’도 역시 [옥추보경집주]이다. 결국 이들 다섯 단어는 각각 독립된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신체(身體)를 설명하는 데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책, p.227.
19) “[옥추경(玉樞經)] : [옥추보경(玉樞寶經)]이라고도 한다. 조선 시대에는 점복․
제사에 쓰이는 도가(道家)의 위서(僞書). 조선 시대에는 맹인․박수들이 점을 치
거나 제사․기도를 드릴 때 흔히 도․불 혼합의 주문을 외웠는데, 그 중에 도교
에 가탁하여 꾸며 낸 것 가운데 하나가 [옥추경]이다. 이것은 중국 본래의 도교 경전에는 없는 것으로, 소위 [뇌성보화천존법어(雷聲普化天尊法語)]를 칭하여 후
인이 조작한 것이라고 한다.” 김승동 편저, [도교사상사전] (부산: 부산대학교출
판부, 1996), p.685.
20) 이능화(李能和:1868-1945)는 [조선불교통사](1918),[조선무속고](1929),[조선
도교사(朝鮮道敎史)]등 많은 저서를 남긴 일제시기의 학자이다. 활동한 시기로
볼 때 안확(安廓)과 더불어 계몽시대 사학자로 지칭되기도 한다. 또한 분류사(分
類史)를 중심으로 그 나름대로 학문적인 세계를 개척했으나 전통적인 방법의 자료 수집과 정리에 치우치고, 특히 민족사에 대한 역사의식이 철저하지 못했다는
평을 받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능화 [李能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
중앙연구원)
21) 이규경(李圭景:1788~1856?)은 정조의 총애를 받은 이덕무(李德懋)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정밀한 고정(考訂)과 변증(辨證)으로 조선 후기 실학의 영역을
넓혔다. 백과전서파로도 불린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규(伯揆)이며 호는
오주(五洲)․소운거사(嘯雲居士)이다. 조부는 이덕무인데 그는 북학파의 한 사람
으로 고금의 제자백가와 기문이서(奇文異書)에 통달했을 뿐만 아니라 문장에서
도 새로운 조류를 일으켜 문명(文名)을 일세에 떨친 실학자였다. 아버지 광규(光
葵)는 할아버지의 유고를 편집했으며 검서관(檢書官)으로 규장각에 봉직했다. 그
는 이러한 집안의 분위기, 특히 할아버지의 학문과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규경 [李圭景]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2) 이규경은 1832년(순조 32) 병으로 요양 중에 예전에 써둔 원고를 정리하기로
결심하여, 1834년 가을에 [오주서종(五洲書種)]의 '금석'(金石)과 '옥석'(玉石)
부분을 완성했고, 1839년(헌종5) 가을에는 '군사 기술' 부분을 완성했다. 그 후
우리나라 및 중국, 그 밖의 고금사물(古今事物)을 의의가 있거나 고증의 필요가
있는 것을 모두 정리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를 저술했다. [네
이버 지식백과] 오주연문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 (두산백과)
23) “(三) [옥추경(玉樞經)]은 도가(道家)의 위서(僞書) : 소운거사 이규경(嘯雲居士
李圭景)이 지은 오주연문(五洲衍文) 도서변증설(道書辨證說)에 이르기를, 포박
(抱朴子)과 성식(段成式) 도경목록(道經目錄)에 옥추경(玉樞經)이 실려 있지 않
은 것은 두광정(杜光庭)의 무리가 잘못 썼기 때문에 실리지 않은 것은 아닐까. 왕감주 세정(王弇州 世貞)의 글에 옥추경은 뇌성보화천존(雷聲普化天尊)의 법어
(法語)라고 하였으니 이는 두광정의 위찬(僞撰)이라 하겠다.” 이능화 편술, [조선도교사], 이종은 역주 (서울: 보성문화사, 1996), p.269.
24) “[옥추경] 중에 사대(四大-사람의 몸)를 거두지 못하고 –신에게 맹세하고 부
처에게 저주하여- 무덤을 송사(訟詞)하고 기록한다는 등의 문귀는 아마도 후인의 위찬(僞撰)일 것이니 왕세정의 말이 옳은 듯하다.” 이능화, 앞의 책, p.269.
25) 이규경은 다음과 같이 옥추경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옥추경이 별
도에 한 책이 있다”하는데, 어떤 사람이 대옥추경이라고 칭하면서 비밀히 간직
하여 전하여 주지도 않고 남에게 보여주지도 않는다. 아직 진본인지 위본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말이 그럴 듯한 점이 있다. 어떤 사람은 “대옥추경도 우
리나라에 입수되어 간직한 자가 있다”한다. 또 한 가지 증거가 있는데 이를 테
면 명나라 진미공(陳眉公)이 옥추경 주를 달면서 사방의 광명뇌왕을 칭하였다. 옥추경 주에 (중략)......라고 하였다. 그런데 현행 옥추경에는 이런 주석이 없으
니 아마 따로 한 책이 있는가 보다. 감주 왕세정(王世貞)의 저서에는 “구천응원
뇌성보화천존옥추경이니 당나라 때의 두광정(杜光庭)이 위작한 것이다”하였으니
현행 옥추경은 바로 두광정이 지은 위서이다. 또 도장이나 석전의 옥추경이 모
두 다르니 진본과 위본이 혼돈된 이상 누가 그에 대한 판별할 수 있겠는가? 삼
교의 경전들이 번번이 이런 것이 많으니 일체 의심스러운 그대로 전하여 줄 수
밖에 무슨 변증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짐작컨대 어떤 도사가 도가의 학설을 대
략 주워 모아 옥추경을 편집하여 벽사하는 방술로 삼아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면
서 진리를 수행하는 행각이 되어 장삼을 걸치고 밥을 빌어먹는 자료로 하였던
것인가 보다.” 구중회, 앞의 책, pp.23-24.
26) 같은 책, p.13.
27) 이능화, 앞의 책, p.265.
28) [이조실록] (평양: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 1993), 310권, p.380.
29) 같은 책, 311권, pp.16-17.
30) 같은 책, 311권, p.22.
31) 같은 책, 323권, p.406.
32) 1762년 경모궁(景慕宮, 사도세자)의 죽음은 천고에 없는 변이라. 정조(正祖)께
서 1776년 즉위 직전에 영조(英祖)께 상소하시어 “승정원(왕의 비서실)에 있는
그날의 기록을 없애소서”하여 그 기록을 없앴으니, 이는 정조의 효성으로 그날
일을 여러 사람이 아니 보는 이 없이 함부로 보는 것을 서러워하심이라. 그날
일은 이미 사십 년이 넘는 오랜 시간이 흘러 일의 경과를 아는 이가 거의 죽었
으니… 혜경궁 홍씨 지음, [한중록], 이선형 옮김 (파주: 서해문집, 2003), p.19.
33) 같은 책, pp.126-127.
<2013년 대순사상논총 - 글 일부 발췌>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 신앙에 대한 한․중 제도권의 대응
- [옥추경(玉樞經)]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 박용철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