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 보타전 벽화 - 의상대사의 생애

문화/생활천상 (선녀) 2019 夏

 

낙산사 보타전에는 의상대사에 대한 일화를 벽화로 그려놓았습니다.
벽화와 연결하여 의상대사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의상의 속명은 김일지(金日芝)로, 625년(신라 26대 진평왕 47년)에 경주에서 3월 15일 신라 왕실 김씨 한신공과 선나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644년(선덕여왕 13년)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해 승려가 되었고 20세에 낭산(狼山) 황복사(皇福寺) 안함대사를 은사로 출가해 황룡사 자장율사에게 계를 받았다.
 
안함대사가 열반에 들자, "효(曉)자 든 사람을 벗을 삼고 지(智)자 든 사람을 스승으로 삼아 공부하라"는 생전 스승의 유언에 따라 삼량주(양산) 영취산 반고굴 '원효'를 찾아가 도반으로서 함께 불법을 공부하였다.

 

 

 




661년(문무왕 원년) 의상은 원효와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그들은 큰 배를 구하여 당항성(지금의 경기도 화성시)을 통해 바다를 건너가려고 계획하여, 당항성으로 가던 도중에 갑자기 험한 비를 만나게 되었다.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겨우 토굴을 찾아 길옆의 토감(土龕) 사이에 몸을 피해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원효법사가 목이 말라서 물을 찾았다. 몹시도 달콤하게 토감(土龕)에 있는 물을 마셨다. 다음날 원효가 그 물을 확인해보니, 그것은 원래 시체의 썩은 즙이었다.
원효는 마침내 다시 별도로 스승을 찾지 않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한 채 신라로 되돌아와 『화엄경(華嚴經)』을 주석하였다.

그러나 의상은 661년(문무왕 원년)에 당의 사신을 따라 뱃길로 중국 유학을 떠났고, 양주(揚州)에 머무르다가 이듬해부터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서 중국 화엄종(華嚴宗)의 2대 조사(祖師)인 지엄(智儼, 602∼668)에게서 현수국사(賢首國師)와 함께 화엄(華嚴)사상을 배웠다.

 



 


중국 <송고승전(松高僧傳)> 제4권 "의상전"에는 의상과 선묘낭자 사랑 설화가 전해져오고 있다.

당나라 등주에 도착한 의상은 주장(州將)인 유지인(劉至仁)의 청으로 주(州) 관아에 머물며 극진한 공양을 받았다.
유지인(劉至仁)에게는 선묘(善妙)라는 뛰어난 미모를 갖춘 딸이 있었다. 낭자는 신라라는 타국에서 온 청아하고 단정한, 용모가 준수한 의상을 보자마자 한 눈에 반하게 되었다. 선묘낭자는 국경을 넘어 사랑을 표하며 스님을 사모하였는데  불자(佛子)의 길을 겆는 의상스님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서 선묘낭자도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다.
그리고 사모하는 마음은 가슴 깊이 간직한 채. 의상을 스승으로 삼아 불도(佛道)를 행하고 믿는 마음(道心)을 일으키게 되었다.

 


 


서기662년에 의상은 당나라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 도착하여 지엄 화상(智儼和尙)을 뵙고 엎드려 큰절 삼배를 올리고 제자가 되기를 청한다
지엄은 이미 간밤에 꿈을 꾸어 의상이 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해동국(海東國)에 큰 나무가 자라서 그 잎과 줄기가 중국 종남산(終南山)까지 뒤덮었고, 그 나무가 하도 크게 자랐기에 나뭇가지 위에 올라가 보았더니, 그 나무 가지 위에 큰 봉황새 둥우리가 있었는데 둥우리 속을 들여다보니 놀랍게도 그 안에 마니보주가 들어있었는 꿈이었다
(마니보주는 용왕에 머리에서 나왔다는 여의주 구슬인데 구슬을 지니고 있으면 어떠한 독도 해칠 수가 없고, 불에 태워도 타지 않는다고 한다)

 

 

 

 


이리하여 의상은 지엄화상의 여러 제자들과 화엄경을 참구하고 또 참구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의상은 화엄경을 펴놓고 법계를 관하다가 비몽사몽간에 한 신을 만나게 되는데 이르기를  “이거 보시게 의상, 이제 그대는 그대가 배우고 깨달은 바를 반드시 저술하여 중생들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야 지체하지 말 지어다.” 이렇게 두 번 세 번 당부하는 것이었으며, 그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꿈을 꾸었는데, 화엄경에 나오는 선재동자가 꿈에 나타나서 머리가 총명해지는 약을 주는  꿈이었고, 또 푸른 옷을 입은 청의동자가 나타나서 화엄에 도리를 나타낼 비결을 가르쳐주고 사라지는 꿈을 꾸게 된다. 이렇게 의상이 세 번이나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는 최 치원이 지은 의상전에 기록이 되어 있다.

 


 


상은 세 번이나 이상한 꿈을 꾸고 나서 스승 지업화상께 말씀을 드리니 "그대가 배우고 깨달은 화엄에 도리를 반드시 저술하여 세상에 전하라는 부처님의 분부이니 만큼 속히 시행토록 해야 할 것이야" 라고 하여 의상은 화엄의 도리를 글로 지어서 대성전 열전을 엮고 지엄에게 올리게 된다.
 지엄 화상은 의상이 글을 쓴 종이를 불에 태우니 글 가운데, 210자는 끝까지 불에 타지를 아니했으며 이 210자로 게송을 만들게 하였다.

 



 


바로 이 게송이 오늘날 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유명한 의상스님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이다.

法性圓融無二相(법성원융무이상) 諸法不動本來寂(제법부동본래적)
無名無相絶一切(무명무상절일체) 證智所知非餘境(증지소지비여경)
眞性甚深極微妙(진성심심극미묘) 不守自性隨緣成(불수자성수연성)
一中一切多中一(일중일체다중일) 一卽一切多卽一(일즉일체다즉일)
一微塵中含十方(일미진중함시방) 一切塵中亦如是(일체진중역여시)
無量遠劫卽一念(무량원겁즉일념) 一念卽是無量劫(일념즉시무량겁)
九世十世互相卽(구세십세호상즉) 仍不雜亂隔別成(잉불잡난격별성)
初發心時便正覺(초발심시변정각) 生死般若常共和(생사열반상공화)
理事冥然無分別(이사명연무분별) 十佛普賢大人境(십불보현대인경)
能仁海印三昧中(능인해인삼매중) 繁出如意不思議(번출여의불사의)
雨寶益生滿虛空(우보익생만허공) 衆生隨器得利益(중생수기득이익)
是故行者還本際(시고행자환본제) 叵息妄想必不得(파식망상필부득)
無緣善巧捉如意(무연선교착여의) 歸家隨分得資糧(귀가수분득자량)
以陀羅尼無盡寶(이다라니무진보) 莊嚴法界寬寶殿(장엄법계실보전)
窮坐實際中道床(궁좌실제중도상) 舊來不動名爲佛(구래부동명위불)

 




이후 신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던 의상은, 당나라에서 신라를 치려한다는 변고를 알게되고 서둘러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삼국유사>에는 당 나라 군대가 신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알리기 위해 서둘러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10년간 화엄불교학을 공부하고 귀국하는 길에, 의상은 처음 당나라에 왔을 때 자신에게 후의를 베풀어 주었던 선묘낭자의 집을 찾았다. 의상이 종남산으로 들어간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를 하고 있다는 선묘낭자의 부친 이야기를 듣고, 의상은 마음이 애처로왔지만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기에 선묘낭자를 보지 못하고 배를 타게 되었다.
뒤늦게 의상스님의 행적을 안 선묘낭자는 의상의 배가 무사히 신라에 닿기를 기원하였고, 또한 영원히 의상을 모실수 있기를 기원하며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 바램은 선묘낭자를 용으로 화현시켰고, 풍랑속에서도 의상은 무사히 선묘룡(선묘낭자)의 도움으로 신라에 도착하게 된다.





귀국한 뒤에 동해의 굴에서 관음보살(觀音菩薩)를 친견(親見)하고 낙산사(洛山寺)를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데, 당시의 <백화도장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이 전해진다.
 
그리고 의상은 사찰을 창건하라는 왕명을 받고 봉황산에 갔는데, 그곳에 먼저 자리잡은 소승잡배들 때문에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때에 선묘룡(善妙龍)나타나 사방 십리의 대반석(大磐石)을 공중으로 세차례나 들어올렸다 놓자 잡배들은 모두 그 위신력에 질려 마침내 굴복하고 사죄하였다.
 
"浮石(뜬 바위)"라는 절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것인데 676년(문무왕 16년)이었다.
이곳이 과거 삼국(三國)의 요충지였던 죽령(竹嶺) 봉황산에 건립된 "부석사(浮石寺)" 이다.





의상은 화엄의 교리를 널리 전파하였고 제자를 양성하여 ‘해동(海東) 화엄(華嚴)의 초조(初祖)’라 불리게 된다. 또한 일본 땅에 화엄불교가 전래된 후로 선묘는 女神이 되어 지극한 존승을 받기도 한다.

702년(효소왕 11년)에 의상대사는 78세의 나이로 입적(入寂)하였으며, 고려 숙종에게 ‘해동화엄시조 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천상 (선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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