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님의 이궁(移宮)이 갖는 의미

기획비상 (날개) 2018 冬

 

 1968년 7월 19일(음력 6월 24일), 도전님께서는 상제님 화천치성을 마치신 후 아침 일찍 감천도장을 나오셨다. 그리고 아미동 고개를 넘어 해운대로 가셨다가 서울에 올라오셨다. 이 사건을 우리는 ‘도전님께서 이궁하셨다’라고 말한다.



<태극도 감천도장>

  일반적으로 ‘이궁(離宮)’은 임금이 왕궁 밖에서 머물던 별궁(別宮)을 말하며 행궁(行宮)이라고도 한다. 이 행궁은 피서(避暑)·피한(避寒)·요양을 위해 짓거나 경승지(景勝地)에 짓기도 하였지만, 통치력의 효과적인 파급을 위해 지방의 요지에 이궁을 지어 돌아가면서 머물기도 하였다.01 이와는 달리 대순진리회에서 쓰는 ‘이궁(移宮)’은 나라의 도읍을 옮기는 천도(遷都)의 개념으로 이해하고있다. 왜냐하면 도전님께서는 이궁 이후로 감천도장에 한번도 가지 않으셨고 서울에 새로운 도장을 정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천도장은 더 이상 궁(宮)이 될 수 없다. 그 근거는 『전경』과 「도전님 훈시」 말씀에 있다.

  『전경』 예시 74절에 임진왜란 때 일본인의 삼한당(三恨堂)02 중 첫째로 “저희들이 서울에 들어오지 못함이 일한(一恨)이오”라는 말씀은 그들이 한양의 궁궐은 정복했지만, 의주로 피난 간 선조 임금을 잡지 못한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서울은 선조 임금과 그가 머무는 곳이 된다. 또한 도전님께서는 “내가 있는 곳이 도장(道場)이다”03 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도전님께서 계시는 도장에 영대를 지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도전님과 도전님께서 계신 곳이 곧, 도장이고 궁(宮)인 것이다. 이 두 가지 근거로 궁(宮)은 임금이 계신 곳이므로 도전님 또는, 도전님이 계신 곳[道場]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도전님의 이궁(移宮)은 출궁(出宮)이라 할 수 없고 이궁(離宮)이라 할 수도 없다. 감천도장은 도전님께서 떠나셨고 다시 돌아가지도 않으셨으므로 더는 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궁(移宮)이라는 용어는 도전님과 도전님께서 창설하신 대순진리회를 이해할 수 있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도전님의 이궁과 이궁 이후의 감천도장 상황을 살펴보면서 도전님께서 이궁하신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겠다.

 

 

< 도주님 능소와 감천동 전경>

 


출항하는 감천도장

  원래 부산 감천도장은 도주님이 계시던 내정인 정사(精舍)와 2층 대강전, 두 채뿐이었다. 정사나 대강전 건물도 모두 작은 판잣집으로 도주님의 손때가 묻어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냥 내버려두면 썩어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도전님께서는 종통계승을 하신 후 바로 대강전과 정사에 시멘트를 새로 바르고 철망도 쳤다. 그리고 1958년 8월에는 도주님의 유법에 따라 도장 내에 진양원(眞養院), 백학관(白鶴館), 청학관(靑鶴館), 종각(鐘閣) 등의 건축공사를 착공하여 다음 해인 1959년에 완공하셨다. 도전님께서 모든 공사는 도주님의 유법에 맞추어 행하시었으며 특히 백학관은 도주님께서 직접 도면을 그려주신 그대로 지으셨다고 말씀하셨다.

  도전님께서는 도주님께서 화천하신 후 1959년부터 1960년까지 파란곡절을 겪으셨다. 당시 부산에서는 태극도 사건이 크게 이슈화되었으므로 밖에서는 태극도가 무너져 다 없어진다고 했지만, 안에서는 도전님을 중심으로 요동 없이 공부하고 포덕도 더 잘 되었다. 그리고 감천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고등공민학교(중학교)도 짓고 시장04도 세웠다.05 이처럼 도전님께서는 종통 계승자로서 수도에 필요한 건물을 짓다 보니 감천도장이 변했다고 하셨다.

 

 

도주님 화천 후에 수도하는 데 필요한 집을 설계 없이 생각나는 대로 지었다. 이것은 대순성적도(大巡聖蹟圖)에 나와 있다. 나도 그림을 보고 생각났는데, 짓고 나니 그 형태가 배 형국이었고 그 배가 감천 앞바다를 향해 머리를 대고 있었다. 내 생각대로 필요해서 짓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06
 
  대순성적도는 여주본부도장 대순성전 3층에 상제님·도주님의 일대기인 성화(聖畵)와 도전님의 성업(聖業)을 모신 그림이다. 도전님의 성업을 모신 위치는 원위 우측 상제님의 강세와 유년시절과 도주님의 성화 사이에 총 8폭으로 모셔져 있다. 그중 4폭은 대순진리회 도장이고 나머지 4폭은 태극도 시절 도전님의 성업이다. 태극도 시절 도전님의 성업을 보면 태극도 감천도장의 대강전·백학관·청학관 등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그 주위를 담으로 빙 둘러 감싸서 마치 배의 형국이었다. 도전님께서는 이 그림을 보시고 배가 감천 앞바다를 향해 머리를 대고 있었다고 하신 것이다.  

1961년부터 감천도장 목수를 맡았던 윤영준 보정이 도전님의 분부를 받들었다. 감천도장은 공사를 계속 진행하면서 도장 둘레 전체를 축대로 쌓았기 때문에 산 위에서 보면 배 형상을 띠고 있었다. 원래 옥녀봉 쪽 포장실 뒤쪽에는 축대가 쌓여 있지 않았다. 축대가 없는 곳에 임원들이 도전님께서 반대하는데도 임의대로 임원식당을 지었다. 그런데 그 방벽이 터졌다. 그래서 도전님께서 윤보정에게 새끼줄을 가져오라고 하셔서 포장실에서 새로 지은 북쪽 회관 오른쪽 끝까지 연결하셨다. 그러시면서 완전히 배가 감천항으로 뱃머리를 돌렸다고 하셨다. 그렇게 하려고 하신 게 아닌데 건물을 짓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고 하셨다. 당시가 무신년(1968년) 6월 24일 상제님 화천치성을 모시기 전쯤이다.
 
“이곳 감천 터는 좌측에 천마산과 우측에 옥녀봉이 자리하고 있어,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배 형상을 띠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배는 앞뒤가 똑같이 뾰족한 상태여서 가야 할 방향이 뚜렷하게 정해지지 않은 채 물에 떠 있는 형국이었습니다. 그땐 도가 성(盛)하지 않아 총무부 사무실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전님께서는 남문 쪽에 총무부 사무실을 짓고, 법학관·대강전·진양원·수진각·호장실을 증축 및 보수하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관을 북문 쪽에 영화관처럼 길게 나열하는 방식으로 새로이 세우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도전님의 분부를 받들면서 느낀 점은 이미 모든 일을 알고 계신 분 같았습니다. 각각의 건물터를 닦아 기초를 다지는 데에도 일일이 세세하게 설명해 주셨으며, 아무렇게나 지시하시는 것처럼 보여도 막상 그 자리에 건물을 세우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안성맞춤인 자리가 완성되었답니다. 그리고 감천도장의 건물 증축 및 신축이 끝난 후, 아래는 뱃머리처럼 뾰족하고 위로 갈수록 넓어지는 형상의 도장이 만들어졌답니다. 바로 감천도장이 배와 똑같은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산 위에 올라가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저는 내심 ‘정말 대인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07
 
  1967년에 북문에 회관을 짓자, 뱃머리가 감천 바다로 가게 되어서 마치 새로 지은 회관이 선장실과 같았다. 나중에 도전님께서 “이제 뱃머리는 돌렸다. 배는 만선이 되면 뜨느니라”고 하셨다. 그때 감천도장에 3000세대가 공부를 하니 주문소리가 끊일 날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도통 주신다는 말씀인가 하고 뱃놀이 가는 생각만 했지 도전님께서 감천도장을 떠나실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고 한다.08


<태극도 안내서 1966년>

이뿐만 아니라, 도전님께서는 생계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수도에 전념하고 있는 도인들을 많이 걱정하셨다. 그래서 남쪽 출입문 부근에다가 이발소를 만들고 도인들에게는 반액만 받게 하셨다. 또한, 북쪽 출입문 아래 능선 길 위에는 점포를 만들어 어려운 형편에 처한 도인들을 먹고 살게 하시려고 계단식 형태로 점포 4~5동을 도장 양쪽 길가에 만들게 하셨다.

  그 무렵 포장(선감)·호장(교감)들은 도전님을 불신하고 뜻을 따르지 않았다. 1968년 7월(음력 6월) 도전님께서는 신축된 회관에서 첫 총회를 여시면서, 단합과 융합하자는 훈시를 하셨다. 더욱이 이 자리는 임원뿐만 아니라 포령(선무)·호령(교무)까지도 참석하였다. 이때 도전님께서는 여간해서 낙루(落淚)를 안 하시는데, 눈물을 떨구셨다. 임원들의 불신과 배신으로 인해 그러신 것이 아니라 만수 도인 모두를 데려가지 못해서 가슴 아파하셨던 것 같다.

  상제님 화천치성을 마친 후, 도전님께서 이궁하셨다는 소문이 감천도장 내에 자자해지자 당시 윤보정은 단걸음에 천마산을 올라 감천도장을 직접 내려다보았다고 한다. 천마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배는 감천항을 향해 있었고, 도장 주변 계단식 점포들의 지붕이 너울을 펼치고 있는 형상이었다 한다. 마치 배가 움직이면 주위의 너울이 출렁이는 것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제 배가 서울을 향해 출항한 것이다.

  도전님께서도 당시를 회상하시면서 상제님 화천치성을 마치시고 감천도장을 떠나는데 그때 신명들도 아미동 산 고개를 넘어 다 떠나가더라고 하셨다. 그것은 도전님께서 떠나시니 신명들도 함께 나오셨다. 따라서 도전님께서 감천도장을 나오신 것을 출궁(出宮)이라 하지 않고 이궁(移宮)이라 하는 것이다. 
 
도장을 보수동에서 감천으로 옮기시고 그 시대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유행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므로 여기에서 파란곡절을 다 겪으셨다. 지성이라 그래서였는지 나(도전님)도 겪었다. 태극도 말엽에 한 3년간 파당이 생겨서 아무리 수습을 하려고 해도 안 되었다. 결국은 나 혼자 나왔다. 그때 심정이 참말로 내가 죄를 지어서 이렇게 된 건가 그랬다. 그때의 최고 간부들, 포장·호장들 나에게 참 잘했었다. 그러나 마음이 돌아가니 안 돌아오더라. 그런데 보니 내가 떠날 때 감천도장의 지형지세는 뱃머리가 바다 쪽으로 나오게 돌아간 모양이 되었고, 축대는 마치 뒤에서 파도치는 형상과 같았다. 그래서 내가 부산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고, 내가 떠나니 신명들도 아미동 산 고개를 넘어 다 떠나가더라.09
 
 
수륙병진도수

김광찬·신원일·정성백·김선경·김보경·김갑칠·김봉규 등 여러 종도 들이 이월 그믐에 동곡에 모였느니라. 다음 달 이튿날 상제께서 공사를 보시기 위하여 서울로 떠나시면서, “전함은 순창(淳昌)으로 회항하리니 형렬은 지방을 잘 지키라”고 이르시고 “각기 자기의 소원을 종이에 기록하라”고 모여 있는 종도들에게 명하시니 그들이 소원을 종이에 적어 상제께 바치니 상제께서 그 종이에 안경을 싸시고 남기·갑칠·성백·병선·광찬을 데리고 군항(群港)으로 가서 기선을 타기로 하시고 남은 사람은 대전(大田)에서 기차를 타라고 이르신 후에 이것을 수륙병진이라고 이르셨도다. 그리고 상제께서 원일에게 “너는 입경하는 날로 먼저 종이에 천자 부해상(天子浮海上)이라고 정서하여 남대문에 붙이라”고 명하셨도다. 원일은 곧 여러 사람과 함께 대전으로 떠났도다. (공사 1장 17절)
 
 
상제께서 군항으로 떠나시기 전에 병선에게 “영세 화장 건곤위 대방 일월 간태궁(永世花長乾坤位 大方日月艮兌宮)을 외우라”고 명하시니라. 군항에서 종도들에게 물으시기를 “바람을 걷고 감이 옳으냐 놓고 감이 옳으냐.” 광찬이 “놓고 가시는 것이 옳은가 생각하나이다”고 대답하거늘 상제께서 다시 종도들에게 오매 다섯 개씩을 준비하게 하시고 배에 오르시니 종도들이 그 뒤를 따랐도다. 항해 중 바람이 크게 일어나니 배가 심하게 요동하는도다. 종도들이 멀미로 심하게 고통하므로 상제께서 “각자가 오매를 입에 물라”고 이르시고 갑칠로 하여금 종이에 싼 안경을 갑판 위에서 북쪽을 향하여 바다 위에 던지게 하였으되 그가 북쪽을 분간하지 못하여 망설이고 있는지라. 상제께서 다시 갑칠을 불러들여 “왜 얼른 던지지 못하느냐”고 꾸짖으시니 그는 그대로 아뢰었도다. 상제께서 “번개 치는 곳에 던지라”고 이르시니 그는 다시 갑판에 올라가니 말씀이 계신 대로 한쪽에서 번개가 치는지라 그곳을 향하여 안경을 던졌도다. (공사 1장 18장)
 
 
  도전님께서는 “『전경』의 ‘천자부해상(天子浮海上)’은 수륙병진(水陸竝進) 도수를 뜻한다. 그것은 내가 부산에서 나왔을 때 서울로 오지 않았냐. 배가 꼭 바다의 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법은 서울에서 만방으로 나간다”10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수륙병진도수는 도전님께서 부산에서 나와 서울로 오셔서 도장을 창건한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도전님께서는 감천을 떠나게 한 사람들이 대순진리회의 공로자들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감천을 떠나도록 한 사람들이 대순진리회의 공로자들이다. 서울도장의 창건은 상제님의 수륙병진도수(水陸竝進度數)에 의한 것이다. 남대문에 천자부해상(天子浮海上)을 써 붙였고, 소원을 적은 종이에 안경을 싸서 북쪽으로 던졌으니 곧 서울이다. 도는 변화다. 변하는 데 조화가 있는 것이니 변하는 것이 없으면 안 된다.11
 
  이것은 도전님의 이궁이 상제님의 도수에 의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도전님께서는 “도주님께서도 한 번 바꾸신 곳은 두 번 다시 잘 안 가셨으며 그때 도수에 사용하였으면 충분한 것이다”12라고 말씀하셨다. 도주님께서는 재세 시 태인에 무극도장이 있었지만, 신사년(辛巳年, 1941)에 폐쇄된 후 해방이 되어도 다시 찾지 않으셨다. 태인 무극도장에서 무자년(戊子年, 1948)에 부산 보수도장(寶水道場)으로, 보수도장에서 병신년(丙申年, 1956)에 감천도장으로 옮기셨다. 도전님께서도 부산 감천도장에서 서울 중곡도장으로 옮기시고 한번도 부산 감천도장에 가지 않으셨다.

  도전님께서는 상제님께서 공사 보신 『전경』의 군항(郡港)은 전북 군산(群山)의 항구라고 하시며 군산의 군(群)은 무리가 많다는 뜻이라고 말씀하셨다. 상제님께서 군산에서 수륙병진도수를 보셨는데, 군산은 부산을 의미한다고 하셨다. 부산(釜山)은 가마솥 부(釜)로서 파자하면 팔금산(八金山) 또는 입금산(入金山)이라고 한다.13 부산 동구 초량 옆에는 시루와 똑같이 생긴 동산인 증산공원이 있다.14


<인공위성에서 내려다 본 부산 감천도장의 모습>

해방 후는 마치 지금과 같이 뭐든지 마음대로 해도 되는 때였기에 보통 사람 같으면 전라도 태인에 가셔서 도장을 지으셨을 텐데 도주님께서는 부산에 가셔서 보수동에 도장을 세우셨다. 부산(釜山)은 팔금산(八金山)이다. 상제님께서 군산(群山)에서 수륙병진도수를 보셨는데, 군산은 부산을 의미한다.15
 
  또한, 도전님께서는 상제님께서 군산에서 서울로 가는 수륙병진 도수를 보셨는데, 도수라는 것은 처음부터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도수가 이루어지는 과정 곧, 목적지가 있으면 어디 어디를 거쳐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도주님께서 회문리에서 도창현으로, 도창현에서 부산으로 가신 것처럼 도전님께서도 부산에서 서울로 21년 만에 나오셨다고 하셨다.
 
군산(群山)에서 수륙병진(水陸竝進)이라 하시며 서울로 가는 도수를 보셨는데, 군(群)은 무리가 많다는 뜻이다. 도수라는 것은 처음부터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령 목적지를 간다면 어디 어디 거쳐서 가는 것이다. 도주님께서는 회문리(會文里: 글이 많이 모인다는 뜻)에서 탄강하시고 을축년[1925년, 31세]에 도창현에서 무극도를 창건하셨으며, 신사년[1941년, 47세]에 무극도가 해산된 지 4년 만에 부산으로 들어가셨다. 도주님께서 무자년[1948년] 부산 보수도장에 상제님을 봉안하신 후 11년 동안 계셨고, 도주님 화천하시고 10년 만에 나도 떠났다. 합하면 부산에서의 21년은 기도주 21자와 같은 수가 된다.16
 
  따라서 상제님께서 전라도 군산과 충청도 대전에서 보신 수륙병진도수는 도전님께서 부산 감천도장을 떠나 서울로 가시는 상황을 말한다. 감천도장은 뱃머리를 바다로 돌려 서울로 출항하였고 도전님께서는 아미동 고개를 신명들과 함께 넘으시고 해운대, 경주, 대구를 거쳐서 이궁하셨다.
 
 
이궁은 상제님의 수륙병진 천지도수

  도전님께서 감천도장의 건물 증축 및 신축을 끝내신 후, 감천도장이 배와 똑같은 형상으로 되었고 도주님 재세 시 감천항으로 들어왔던 뱃머리가 반대로 감천항으로 나가는 형상으로 바뀌었다. 또한, 도전님께서 상제님 화천치성을 마치시고 감천도장을 떠나셨는데 신명들도 아미동 산 고개를 넘어 다 떠나가더라고 하셨다. 그것은 도전님께서 떠나시니 신명들도 함께 나오신 것이다.

  그리고 도전님께서 이궁은 “상제님께서 공사 보신 수륙병진에 의한 천지도수였다”고 분명히 밝히셨다. 또한, “도(道)는 도수에 따라 변화하는 것인데 태극도 사람들이 나를 서울로 보냈기 때문에 그들이 도의 공로자다”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도전님의 이궁은 상제님의 공사인 “수륙병진도수”로 감천도장을 떠나 서울에 도장을 창설하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도전님께서 서울에 도장을 짓고 대순진리회를 창설하기 위한 과정, 곧 천지도수였다. 그러므로 궁(宮)은 감천도장에서 서울로 도전님에 의해 옮겨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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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네이버 지식백과.
02 김성수, 「삼한당(三限堂)에 대한 연구」, 『상생의 길(1907)』 (경기: 대순진리회 출판부, 2004), p. 103.
03 「도전님 훈시」 (1989. 4. 13).
04 도장 바로 뒤쪽인 오감에 생선가게, 채소 가게, 고무신가게 등이 있었다.
05 「도전님 훈시」 (1991. 09. 28)
06 「도전님 훈시」 (1991. 09. 28)
07 교무부 , 「도인탐방: 연천방면 윤영준 보정」, 《대순회보》83호, (2008), pp.46-47.
08 이재근 선감 인터뷰, (2003. 05. 20)
09 「도전님 훈시」, (1989. 05. 08)
10 「도전님 훈시」 (1991. 02. 12)
11 「도전님 훈시」 (1988. 12. 5)
12 「도전님 훈시」 (1988. 12. 5)
13 예로부터 부산(釜山)을 파자하면 팔금산(八金山)이 된다고 하였다. 부산을 둘러싸고 있는 여덟 개의 산을 팔금산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 산들은 금정산, 백양산, 고원견산, 구봉산, 천마산, 장군산, 황령산, 금련산으로 알려져 있다. 또 팔금산(八金山)은 그 글자 모양으로 보아 입금산(入金山)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14 부산 동구 초량 옆의 좌천동과 범일동 사이에는 증산공원이 있다. 공원 입구의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붙어있다. ‘증산(甑山)은 산의 모양이 시루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동국여지승람』 (1481년)에는 “釜山은 동평현(오늘날 당감동 지역이 중심지였음)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같이 이름하였는데, 그 밑이 곧 부산포(釜山浦)이다.”라고 하여 산 모양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부산(釜山)이라고 하였다.’
15 「도전님 훈시」 1989. 5. 8)
16 「도전님 훈시」 (1984. 12. 27)


비상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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