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주님 능소와 감천동 전경>
도주님 화천 후에 수도하는 데 필요한 집을 설계 없이 생각나는 대로 지었다. 이것은 대순성적도(大巡聖蹟圖)에 나와 있다. 나도 그림을 보고 생각났는데, 짓고 나니 그 형태가 배 형국이었고 그 배가 감천 앞바다를 향해 머리를 대고 있었다. 내 생각대로 필요해서 짓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06
“이곳 감천 터는 좌측에 천마산과 우측에 옥녀봉이 자리하고 있어,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배 형상을 띠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배는 앞뒤가 똑같이 뾰족한 상태여서 가야 할 방향이 뚜렷하게 정해지지 않은 채 물에 떠 있는 형국이었습니다. 그땐 도가 성(盛)하지 않아 총무부 사무실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전님께서는 남문 쪽에 총무부 사무실을 짓고, 법학관·대강전·진양원·수진각·호장실을 증축 및 보수하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관을 북문 쪽에 영화관처럼 길게 나열하는 방식으로 새로이 세우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도전님의 분부를 받들면서 느낀 점은 이미 모든 일을 알고 계신 분 같았습니다. 각각의 건물터를 닦아 기초를 다지는 데에도 일일이 세세하게 설명해 주셨으며, 아무렇게나 지시하시는 것처럼 보여도 막상 그 자리에 건물을 세우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안성맞춤인 자리가 완성되었답니다. 그리고 감천도장의 건물 증축 및 신축이 끝난 후, 아래는 뱃머리처럼 뾰족하고 위로 갈수록 넓어지는 형상의 도장이 만들어졌답니다. 바로 감천도장이 배와 똑같은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산 위에 올라가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저는 내심 ‘정말 대인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07
도장을 보수동에서 감천으로 옮기시고 그 시대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유행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므로 여기에서 파란곡절을 다 겪으셨다. 지성이라 그래서였는지 나(도전님)도 겪었다. 태극도 말엽에 한 3년간 파당이 생겨서 아무리 수습을 하려고 해도 안 되었다. 결국은 나 혼자 나왔다. 그때 심정이 참말로 내가 죄를 지어서 이렇게 된 건가 그랬다. 그때의 최고 간부들, 포장·호장들 나에게 참 잘했었다. 그러나 마음이 돌아가니 안 돌아오더라. 그런데 보니 내가 떠날 때 감천도장의 지형지세는 뱃머리가 바다 쪽으로 나오게 돌아간 모양이 되었고, 축대는 마치 뒤에서 파도치는 형상과 같았다. 그래서 내가 부산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고, 내가 떠나니 신명들도 아미동 산 고개를 넘어 다 떠나가더라.09
김광찬·신원일·정성백·김선경·김보경·김갑칠·김봉규 등 여러 종도 들이 이월 그믐에 동곡에 모였느니라. 다음 달 이튿날 상제께서 공사를 보시기 위하여 서울로 떠나시면서, “전함은 순창(淳昌)으로 회항하리니 형렬은 지방을 잘 지키라”고 이르시고 “각기 자기의 소원을 종이에 기록하라”고 모여 있는 종도들에게 명하시니 그들이 소원을 종이에 적어 상제께 바치니 상제께서 그 종이에 안경을 싸시고 남기·갑칠·성백·병선·광찬을 데리고 군항(群港)으로 가서 기선을 타기로 하시고 남은 사람은 대전(大田)에서 기차를 타라고 이르신 후에 이것을 수륙병진이라고 이르셨도다. 그리고 상제께서 원일에게 “너는 입경하는 날로 먼저 종이에 천자 부해상(天子浮海上)이라고 정서하여 남대문에 붙이라”고 명하셨도다. 원일은 곧 여러 사람과 함께 대전으로 떠났도다. (공사 1장 17절)상제께서 군항으로 떠나시기 전에 병선에게 “영세 화장 건곤위 대방 일월 간태궁(永世花長乾坤位 大方日月艮兌宮)을 외우라”고 명하시니라. 군항에서 종도들에게 물으시기를 “바람을 걷고 감이 옳으냐 놓고 감이 옳으냐.” 광찬이 “놓고 가시는 것이 옳은가 생각하나이다”고 대답하거늘 상제께서 다시 종도들에게 오매 다섯 개씩을 준비하게 하시고 배에 오르시니 종도들이 그 뒤를 따랐도다. 항해 중 바람이 크게 일어나니 배가 심하게 요동하는도다. 종도들이 멀미로 심하게 고통하므로 상제께서 “각자가 오매를 입에 물라”고 이르시고 갑칠로 하여금 종이에 싼 안경을 갑판 위에서 북쪽을 향하여 바다 위에 던지게 하였으되 그가 북쪽을 분간하지 못하여 망설이고 있는지라. 상제께서 다시 갑칠을 불러들여 “왜 얼른 던지지 못하느냐”고 꾸짖으시니 그는 그대로 아뢰었도다. 상제께서 “번개 치는 곳에 던지라”고 이르시니 그는 다시 갑판에 올라가니 말씀이 계신 대로 한쪽에서 번개가 치는지라 그곳을 향하여 안경을 던졌도다. (공사 1장 18장)
내가 감천을 떠나도록 한 사람들이 대순진리회의 공로자들이다. 서울도장의 창건은 상제님의 수륙병진도수(水陸竝進度數)에 의한 것이다. 남대문에 천자부해상(天子浮海上)을 써 붙였고, 소원을 적은 종이에 안경을 싸서 북쪽으로 던졌으니 곧 서울이다. 도는 변화다. 변하는 데 조화가 있는 것이니 변하는 것이 없으면 안 된다.11
해방 후는 마치 지금과 같이 뭐든지 마음대로 해도 되는 때였기에 보통 사람 같으면 전라도 태인에 가셔서 도장을 지으셨을 텐데 도주님께서는 부산에 가셔서 보수동에 도장을 세우셨다. 부산(釜山)은 팔금산(八金山)이다. 상제님께서 군산(群山)에서 수륙병진도수를 보셨는데, 군산은 부산을 의미한다.15
군산(群山)에서 수륙병진(水陸竝進)이라 하시며 서울로 가는 도수를 보셨는데, 군(群)은 무리가 많다는 뜻이다. 도수라는 것은 처음부터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령 목적지를 간다면 어디 어디 거쳐서 가는 것이다. 도주님께서는 회문리(會文里: 글이 많이 모인다는 뜻)에서 탄강하시고 을축년[1925년, 31세]에 도창현에서 무극도를 창건하셨으며, 신사년[1941년, 47세]에 무극도가 해산된 지 4년 만에 부산으로 들어가셨다. 도주님께서 무자년[1948년] 부산 보수도장에 상제님을 봉안하신 후 11년 동안 계셨고, 도주님 화천하시고 10년 만에 나도 떠났다. 합하면 부산에서의 21년은 기도주 21자와 같은 수가 된다.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