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단 대순진리회의 변천 과정과 무극 태극의 관계
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1. 들어가며
솔직히 고백하건대 필자는 입도하고 나서 상당한 기간 동안 ‘무극(無極)에서 태극(太極)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었다. 몇 권 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보아왔던 책들은 모두 무극이 태극을 생(生)한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었고,01 또 역(易)과 관련해서 주위에서 들었던 이야기도 그런 것들뿐이었다.
그런데 몇 해 전, 우연히 김병환02이 쓴 「“자무극이위태극(自無極而爲太極)”인가,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인가」03와 「태극 개념 연구(一)」04라는 두 편의 글을 읽게 되었고, 그때 필자는 그간 무극과 태극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여주본부도장 포정문(布正門) 벽면에 ‘대순(大巡)이 원(圓)이며 원(圓)이 무극(無極)이고 무극(無極)이 태극(太極)이라’고 하신 것도 정확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흘리고만 있다가 ‘대순=무극=태극’이라는 등식이 머릿속에 그려졌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 와중에 어떤 사람들이 무극도에서 태극도가 나왔고, 태극도에서 대순진리회가 나왔다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대개 ‘나왔다’라고 하면 ‘분파(分派)되었다’는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해 무극도의 한 분파가 태극도라는 말이고, 태극도의 한 분파가 대순진리회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종단의 내부 사정을 잘 파악하지 않고 겉만 보고서 하는 말일 뿐이다. 그간 우리 종단이 이름을 두 번 개명(改名)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개명을 했다고 그 본체마저 바뀐 것은 아니다. 우리 종단의 생명은 종통에 있고 종통은 곧 도의 본체이며, 그 도의 본체가 무극도·태극도·대순진리회를 통해서 굳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기 때문에, 결국 우리 종단은 현재까지 그 외형적 모습을 무극도·태극도·대순진리회로 순차적으로 바꾸어왔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대순진리회요람』의 첫 페이지에 가장 먼저 서술되어 있는 종단의 정의는 이 사실을 시사한다.
대순진리회는 조정산 도주께서 만주 봉천에서 강성상제로부터 그 천부의 종통계승의 계시를 받으신 데서 비롯하여, 유명(遺命)으로 종통을 이어받으신 도전께서 영도하시는 우금(于今)까지 반세기를 훨씬 넘은 六十여 년간의 발전사를 가진 종단의 명칭이다.05
1969년 4월에 발간된 『대순진리회요람』은 종단의 역사를 60년 이상으로 잡고 있다. 1969년부터 60년 이전은 1909년이며 이 해는 도주님께서 만주 봉천으로 가신 때이다. 결국 『대순진리회요람』은 대순진리회가 1909년부터 그 역사를 시작하여 발전을 거듭해 온 종단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1925년부터 1941년까지 존속했던 무극도와 1948년부터 1968년까지의 태극도, 그리고 1969년부터 지금까지의 대순진리회는 모두 1909년 이후부터 내려왔던 하나의 종단이라는 선상에서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그간의 사정에 따라 필자는 무극도와 태극도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대순진리회 변천 과정을 대강이라도 정리해 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아울러 무극에서 태극이 나온 것으로 오해를 해 온 필자와 같은 사례가 없도록, 무극과 태극은 서로 같은 것이라는 사실도 풀어서 적어두면 또한 여러모로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2. 종단 대순진리회의 변천 과정
(1) 무극도에서 태극도로
우리 종단이 처음 창설되었을 때의 이름은 ‘무극도(無極道)’였다. 무극도 창도로부터 태극도까지의 연혁은 『대순진리회요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一九二五년(을축년) 四월에 전북 구태인 도창현에 도장을 건설하시고 종단 무극도(无極道)를 창도(創道)하시다.
一九四一년(신사년) 세계 이차대전 당시 일제의 종교단체 해산령에 의하여 종교활동을 일시 중단하시고 전국 명산대천을 순회주환(巡回周環)하시며 수도하시다.
一九四五년(을유년) 八월에 조국광복을 맞이하신 도주(道主) 조정산(趙鼎山)께서는 신앙자유의 국시(國是)에 따라 종교활동을 부활하시다.
一九四八년(무자년) 九월에 도본부(道本部)를 경상남도 부산시에 설치하시다.06
주지하다시피 도주님께서는 1925년에 전북 구태인(舊泰仁)07에 도장을 건립하시고 무극도(無極道)라 이름 하셨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에 의해 무극도가 강제 해산되었지만, 해방이 되자 도주님께서는 종교 활동을 재개하시고 1948년 부산에 도 본부를 다시 설치하셨으며 대략 1950년경에 종단의 명칭을 태극도(太極道)로 변경하셨다. 이 과정을 보면 무극도에서 태극도가 나온 것, 즉 분파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 단체의 이름이 무극도에서 태극도로 바뀐 것임이 자명하다. 즉 우리 종단이 무극도에서 태극도로 그 외형적 모습(명칭이나 건물, 터 등)을 바꾸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순진리회요람』은 상제님의 도가 펼쳐진 연혁을 종단 중심으로 기술하지 않고 상제님-도주님-도전님으로 이어지는 종통 중심으로 기술하여 두고 있음이 눈에 띤다.08 이것은 중요한 문제로 뒷장에서 다시 언급하게 될 것이다.
(2) 태극도에서 대순진리회로
다음으로 우리 종단이 태극도에서 대순진리회로 바뀌는 과정을 살펴보자. 여기에서 논쟁의 초점이 되는 것은 태극도에서 대순진리회가 나온 것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이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우리 종단이 어떻게 규정되는지부터 먼저 파악해야 하고, 그러려면 도주님으로부터 도전님께로 종통(宗統)이 전수되는 과정부터 개괄해보아야 한다.
① 도주님께서는 상제님의 친자종도(親炙宗徒)09가 아니셨다. 그러나 도주님께서는 만주(滿洲) 봉천(奉天)에서 구세제민(救世濟民)의 뜻을 품고 입산수도하시다가 1917년 대순진리에 감오(感悟) 득도(得道)하시고 종통 계승의 계시를 받으심으로 해서 종통을 세우실 수 있었다.10 도주님께서는 상제님의 공사를 풀어나가시며 50년 공부 종필(終畢)로써 수도와 도통을 위한 모든 진법(眞法)을 세우셨다.
1957년 섣달이 되자 천부(天賦)의 종통계승자이셨던 도주님께서는 당신 다음의 종통을 세우시고자 하셨다. 이 무렵 도전님(당시는 도전 직책을 맡고 있지 않으셨음)께서는 도주님으로부터 “도전 오치국을 교체하려 하니 적임자를 말하라.”는 말씀을 들으셨다. 원래 도주님 재세시에는 육원제도(六院制度)라는 것이 있었으니 곧 시봉원, 포정원, 호정원, 전학원, 사정원, 보정원을 말했다. 그중 시봉원의 책임자가 도전(都典)이었고 도전을 보좌하는 직책으로 부전(副典)이 있었으며 당시 도전은 오치국, 부전은 이인호가 맡고 있던 터였다.11 도전님께서 후보자로 몇 사람을 아뢰었으나 도주님께서는 “마땅치 않다.”고 하시더니, 다음해인 1958년 2월 하순경에 최고 간부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박한경을 도전으로 임명하니 그는 총도전(總都典)이니라. 종전 시봉원의 도전과는 전혀 다르니라.”는 분부를 내리셨다.
여기에서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도주님 말씀대로 도전님께서 받으신 ‘도전’ 직책이 과거 오치국이 맡았던 ‘도전’과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시봉원은 도주님을 시봉(侍奉)하는 곳이기 때문에 시봉원 책임자로서의 도전은 일종의 비서실장과 같이 도주님을 측근에서 모시는 일을 하는 직책이었다. 그러나 도전님께서 새로 받으신 ‘도전’은 종래의 도전과는 달리 도주님의 뒤를 이어 도를 이끌어나가는 ‘최고 책임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해 3월 6일은 도주님께서 화천하시던 날이었다. 그때 도인들이 도주님께 갖은 약을 다 지어 올렸으나 도주님께서는 “내 몸에 손대지 말라. 내가 1분 늦게 가면 너희들은 몇 십 년을 고생한다. 나는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또 의사 김재복이 주사기를 가지고 오자 그것을 빼앗아 바닥에 깨뜨려버리기까지 하셨다.
도주님께서는 간부 전원을 문밖에 시립케 하시고는, 도전님을 불러 도주님의 베개와 이불의 겉을 뜯도록 하셨다. 그 속에는 도인들이 모신 성금을 모아놓은 통장과 도장이 들어 있었는데 도주님께서는 그것을 도전님께 전해주시면서 “서러워 마라. 서러워 마라. 나 없다고 서러워하지 마라. 너는 총도전이니 앞으로 도의 모든 일을 도전령(都典令)에 의해 해 나가면 모든 도인들이 다시 만날 날이 있다. 앞에 있어도 모르고 뒤에 있어도 모르나니 내가 너희들을 찾아야 알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렇게 도주님께서는 도전님께 종통을 계승하게 하시며 도의 운영 전반을 맡아 이끌어나가도록 명을 내리셨다. 잠시 후 도주님의 목소리가 가늘어 잘 들리게 되지 않자 도주님께서는 도전님 귀를 가까이 하게 하고 근 한 시간 동안 도의 운영 사항 전반에 대해 말씀을 전하셨다.
그런데 바로 그때 김○○(협동상회 대표), 이○○(초대 도전이었음), 박○○(내무책 겸 수도책) 3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도주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크게 진노하시며 “당장 저 도적놈들을 내쫓아라.”고 하시며 “도적놈! 도적놈! 도적놈!”이라고 세 번 외치셨다고 한다. 도주님께서 이들을 보고 도적놈이라고 하신 데에는 그럴만한 속사정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전국이 전쟁터였던 우리나라는 먹을 것이 없어 거의 모두가 굶주리고 있었다. 1955년 도주님께서는 도인들의 배고픔을 덜어주시기 위하여 쌀을 직접 들여와서 싸게 파는 싸전을 내어주셨다. 싸전의 영업이 잘 되어 점점 커지자 도주님께서는 양곡위탁판매업체인 ‘협동상회’와 도정업체인 ‘대원산업주식회사’를 인수하여 경영하게 하셨다. 도주님께서는 그 책임자로 김○○, 이○○, 박○○를 정해 주셨는데, 협동상회가 다른 가게보다 쌀을 더 싸게 팔다보니 발전을 거듭하여 부산시내 전체 쌀 도매상에 쌀을 댈 만큼 커졌다고 한다. 그리고 감천과 아미동에도 협동상회의 분점을 각각 하나씩 더 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 세 사람이 도주님께서 내어주신 가게이고 또 도의 재산이니까 한 푼이라도 개인적으로 유용하면 큰일나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쌀가게를 하다 보니 흙바닥에 쌀, 콩, 팥, 보리 등 잡곡이 떨어지는 일이 빈번했고, 흘린 것도 곡식이라 함부로 버릴 수는 없어 흙 범벅 그대로 모아다가 가마니에 담아두었더니 그 분량이 매우 많았다. 자갈치 시장의 밥장사들이 이 사실을 알고는 이 가마니들을 싸게 사가서 흙을 골라내고 잡곡밥을 지어 지게꾼 노동자들에게 팔기 시작했다. 이 세 사람은 이 가마니가 원래 바닥에 떨어져 있던 곡식을 주워 모아서 만든 것이니까 이것을 팔아 자신들이 임의로 사용하여도 아무런 죄가 없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이렇게 한푼 두푼 돈을 챙기다 보니 점점 재물에 대한 욕심이 커져 갔고, 급기야 협동상회의 쌀을 1말, 2말 몰래 빼내다가 팔아 자신들의 호주머니를 채우는 일까지 생기게 되었다. 도의 재산에 임의로 손을 댄 사실을 알게 되신 도주님의 노여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도주님께서 화천하신다는 소식을 들은 이들 3인이 들어오려 하자 도주님께서는 그들을 “도적놈”이라고 부르시며 당장 쫓아내라고 하신 것이다.12
다시 밖에 시립하여 있던 전체 임원들을 돌아보시며 도주님께서는 “오십년 공부 종필(五十年工夫終畢)이며 지기 금지 사월래(至氣今至四月來)가 명년(明年)인 줄 알았더니, 금년이로다. 나는 간다.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모든 일을 행하여 오던 대로 잘 행해 나가라.”는 말씀을 하셨다. 미시(未時)가 되자 모든 말씀을 마치신 도주님께서 인수(人壽) 64세로 화천하시니, 이 사실과 도주님의 유명(遺命)에 의한 도전님의 종통 계승은 ‘명령전달’과 ‘공포사항’으로 전 도인들에게 알려졌다.
<명령전달>
오십년공부종필이며 지기금지사월래가 금년이다. 나는 간다.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모든 일을 행하던 대로 잘 행해 나가라.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공포사항>
지존13께옵서 무술 삼월 초육일 을미시(오후 한시 삼십칠분)에 화천하시다.
명령에 의하여 앞으로 모든 행사를 종전대로 도전령에 의하여 행함.
모든 도인들은 조금도 낙심말고 성경신을 다하여 수도에 전심할 것.
지존께서도 항상 크게 의심날 일이 있고 땀 뺄 일이 있다 하셨음.
당시에는 인쇄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아서 줄판(속칭 가리방)이라고 하는 철판에 철필로 글을 새기고 잉크를 묻혀 찍어내었고, 이렇게 만든 문서를 도인들에게 직접 일일이 돌렸다고 한다. 이를 전달받은 도인들은 ‘명령에 의하여 앞으로 모든 행사를 종전대로 도전령에 의하여 행해 나가라’는 공포사항에 따라 아무런 동요 없이 도주님과 똑같이 도전님을 모시면서 도전님의 명을 받들어 나갔다. 실로 이때 배포된 ‘공포사항’은 도전님의 종통 계승을 직접적으로 입증해주는 명백한 물증이라고 할 수 있다.
<감천도장에서 태극도를 이끄시던 시절의 도전님 댁 모습.>
② 도주님께서 화천하시고 난 뒤 3년 동안 삼년상이 치러졌다. 이 기간 동안 남자 도인14들은 검은 고무신에 흰옷을 입었고, 여자 도인들은 검은 비녀 혹은 검은 댕기, 검은 신을 신었다. 삼년상이 끝나자 도전님께서는 “이제 물들인 옷도 입고 머리도 자유로이 해라.”고 말씀하셨고 전 도인들은 그대로 그 명에 따랐다. 도전님께서는 삼년상 직후에 봉축주를 바꾸셨다. 원래는 봉축주가 ‘무극신 대도덕 봉천명 봉신교 대운대사 소원성취케 하옵소서’였는데, 삼년상이 끝나자 도전님께서는 봉축주를 ‘무극신 대도덕 봉천명 봉신교 태극도주 조정산 대운대사 소원성취케 하옵소서’로 하라는 명을 내리신 것이다. 그리고는 한 달이 채 못 되어 ‘무극신 대도덕 봉천명 봉신교 조성옥황상제 소원성취케 하옵소서’로 주문을 또다시 바꾸도록 하셨으니, 역시 도인들은 도전님의 명에 아무런 동요 없이 그대로 따랐다. 또한 도주님 재세시에는 감천도장에 오직 대강전(大降殿) 건물 하나뿐이었으나 도전님께서는 수진각, 진양원, 청학관, 백학관 등 건물을 더 지어 넓히셨고, 수도인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시학·시법공부뿐만 아니라 법학·청학공부도 돌리시는 등 도주님의 유법을 받들어 그대로 시행해 나가셨다.15
도주님께서 화천하신 1958년부터 10년 동안 당시 태극도의 도인들은 도전님을 충실히 받들었다. 도전님의 종통 계승이 도주님의 명(命)에 의한 너무나도 분명한 일이었으므로, 태극도의 도인들이 모두 도전님의 명을 따름을 천명을 받드는 것이라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 기간 동안에는 태극도에 종통이 분명히 살아 있었다.16
③ 1967년이 되자, 갑자기 태극도의 임원들이 지금의 중앙종의회에 해당하는 협의회를 중심으로 도전님께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협의회는 포장(布丈: 선감에 해당)·호장(護丈: 교감에 해당)17들이 회원으로 참여하는 회의기구로, 도주님께서 화천하시기 3년 전에 도주님의 명에 의해 만들어졌다. 당시 도주님께서는 수도공부나 치성 행사를 제외한 도중사(道中事)의 운영 문제에 관련된 일을 협의회에서 의논하게 하셨으며 그 의결사항을 항상 챙기셨다고 한다.18 도주님 화천 후에는 도주님의 유명에 따라 종통을 계승하신 도전님께서 도에 대한 운영 전반을 맡으셨고, 협의회도 도주님의 명이었던 만큼 이를 잘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협의회의 의장이 “이제 우리는 그 어느 개인19의 명령에만 좌우되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체계를 밟아 처리하는 지당성을 유지하는 데 본 협의회는 노력하여 나아갈 것이다.”20라는 말을 들고 나와 도전님의 명으로 태극도가 운영되는 것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했다. 또한 교화부장(오늘날의 교무부장)도 ‘협의회가 도전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다가 절대 복종만 한다면 의회를 설립하신 지존의 뜻은 저버리는 것이 될 것’21이라고 하여 협의회 의장의 편에 섰다. 이것은 ‘도전령으로 행하라’는 도주님의 명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일이면서 곧 도주님에서 도전님으로 이어지는 종통을 부정하는 명백한 배도(背道) 행위였다.
과거 도주님께서는 협의회를 만드시고 그곳에서 도무(道務)에 대해 의결하도록 하셨지만, 협의회의 결정대로 시행하지 않으시고 검토를 하신 후 명을 다시 내리셨다고 한다. 그중 하나의 예로, 당시 태극도의 대강전은 원래 협의회에서 임원회관으로 건축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나, 도주님께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설계를 확대·변경하시어 대강전으로 짓게 하셨던 사실을 들 수 있다.22 또 ‘명령에 의하여 앞으로 모든 행사를 종전대로 도전령에 의하여 행함’이라는 공포사항에 따르면, 도전님께서도 도주님처럼 협의회에서 의결한 사항을 검토하신 후 조정을 하실 수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협의회는 종통을 계승하신 도전님의 명령과 관계없이 별도로 움직일 수 있는 기구가 되지 못함은 자명한 일인 것이다. 사실 협의회 임원들의 의도는 ‘도전’이 협의회 임원들과 도무(道務)를 같이 처리해야 하는 직책임을 내세워 자신들도 도전님과 동등한 위치에 서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런 소란이 일어나자 태극도 도인들은 도전님을 따르는 파와 도전님을 배척하는 파로 나뉘게 되었고, 이들 사이에 큰 소요가 일어날 조짐마저 보였다. 도전님께서는 사태를 수습하시기 위하여 1968년 4월 7일 도주님의 유명을 거역하고 종통을 부정하며 도를 혼란에 빠뜨리는 몇몇 사람들에게 자격을 삭권하는 징계를 내리는 성명서를 발표하시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더욱 난동을 부렸다. 이에 도전님께서는 2주일이 지난 4월 22일 다시 지시각서를 내리시어, 도인들이 남을 비방하기에 앞서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또한 어떠한 유언비어에도 현혹되지 말며 오직 수도에만 매진할 것을 촉구하시면서 이에 대한 서약을 겸한 도적부를 다시 제출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협의회 임원들은 도전님의 명을 모두 부정하고 1968년 6월 19일 밤, 자신들의 측근들을 이끌고 도전님의 집무실을 찾아가 에워싼 다음 도전님을 강압(强壓)하여 도의 전권(全權)을 내어놓고 물러나시도록 만들었다.
도전님께서 협의회 임원들에게 망극할 괴로움을 겪으신 며칠 뒤 6월 24일은 구천상제님 화천치성일이었다. 치성이 끝나고 철상(撤床)을 하려 하자 갑자기 과방(果房)이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이를 보신 도전님께서는 아침에 며느리를 불러 깨끗한 와이셔츠 하나를 가져오게 하시어 갈아입으신 후 조용히 출궁하셨다. 훗날 도전님께서는 “과방이 무너지는 것을 보니 상제님께서 치성을 안 받으셨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내가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후 도전님께서는 1969년 4월, 도의 전반적인 기구를 개편하시고 종단 대순진리회를 창설하시어 상제님과 도주님의 유지(遺志)·유법(遺法)을 받드시며 새롭게 수도인들을 영도하기 시작하셨다. 원래 부산 감천에는 10만 수도인들 중에서 약 3,000호 정도가 모여 살고 있었는데 이때 대략 800호 정도만 도전님을 따라왔다고 한다. 도전님께서는 유지(遺志)·유법(遺法)에 따라 포덕천하(布德天下)에 힘을 다하시니, 불과 30년이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수도인들의 수가 200만에 이르렀으며, 여주본부도장을 비롯하여 중곡도장, 제주수련도장, 포천수도장, 금강산 토성수련도장 등 전국 5대 도장도 건립되었다. 또한 사회와 민생을 구제하시기 위하여 구호자선사업·사회복지사업·교육사업을 종단의 3대 중요사업으로 지정하시어 연차적인 계획에 따라 사회발전에 이바지하셨으며, 특히 대진대학교와 전국 6개 고등학교, 분당제생병원을 건립하시는 등 수많은 업적을 이루어 내셨다.
④ 종통(宗統)은 상제님-도주님-도전님으로 이어지는 계보(系譜) 속에서 상제님의 대순하신 유지(遺志)와 도주님께서 짜 놓으신 유법(遺法), 도전님께서 가르치신 유훈(遺訓)으로 전해지는 진리 체계 그 자체로 규정할 수 있다.23 도전님께서 “종통이란 도의 생명이며 진리인 것입니다. 종통이 바르지 못하면 법이 있을 수 없고 경위가 바로 설 수 없으며, 그러므로 그 속에서는 생명이 움틀 수 없으며 만물만상을 이루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24라고 하신 데서 알 수 있듯이 종통은 도의 생명이며 진리이다. 따라서 종통이 사라진다면 곧 도가 사라지게 되고 종단도 생명을 잃게 된다. 여기에서 종통이 사라진다 함은 상제님-도주님-도전님에게까지만 이어지는 계보가 부정되거나 혹은 상제님의 유지, 도주님의 유법, 도전님의 유훈이 부정되는 경우를 말한다.
이런 사실을 전제로 하면서 이제 태극도에서 대순진리회가 나온 것인지 아닌지를 따져보도록 한다. 앞서 말했듯이 『대순진리회요람』은 상제님의 도가 펼쳐진 연혁을 종단 중심으로 기술하지 않고 상제님-도주님-도전님으로 이어지는 종통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 『대순진리회요람』에 따르면 도의 역사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것이 종단이 아니라 종통이며, 또한 ‘종통의 뜻에 따라 종단도 그에 상응하여 변화해왔다’는 사실이 분명하다.25 따라서 종단은 그 외형적 모습을 구성하는 장소, 건물 같은 유형적 요소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종통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순진리회라는 종단이 태극도 도장 건물을 떠나 다른 곳에 새로 지은 건물에 기반하고 있다는 이유로 태극도에서 분파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 종단의 심장은 종통에 있으므로 종통이 어디에 있느냐를 보고 그 본체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하나의 예로 무극도에서 태극도로 바뀔 때의 상황을 들 수 있다. 1925년 전북 구태인에 설립된 무극도장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 당한 뒤 모두 뜯겨 빈 터로 남아있었다. 무극도가 강제 해산될 당시 무극도장 터의 소유자는 김진염(金鎭)이었고, 김진염 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평생 종교에 헌신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김진염은 무극도의 도인으로 봐도 무리가 없다. 일제에 의해 무극도장의 건물이 모두 해체되고 그 터도 헐값으로 일본인의 소유로 넘어갔지만 1944년 김진염은 그 땅을 지키기 위해 주변 친척들의 돈을 끌어 모아 다시 그 땅을 사들였다. 그러나 해방이 되었음에도 도주님께서는 무극도장 터를 다시 찾지 않으시고 1948년 부산 보수동에 도의 본부를 설치하시며 도명(道名)을 태극도(太極道)라 하셨다. 결국 무극도장 터에는 도장이 들어서지 않았다. 도주님 말씀처럼 ‘그 시기의 도수(度數)에 쓰였으니 족했던 것’이다.26 결국 1955년 김진염 일가는 그 땅을 어찌 사용해 볼 도리가 없어서 재단법인 영원학원(永圓學院)에 기증하고 만다.27 1948년 당시 무극도 도인이 무극도장 터를 어렵게 찾아 지키고 있던 상황에서, 도주님께서 그 터에 도장을 다시 세우고 종단을 출범시키시기란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도주님께서는 1941년 구태인의 무극도장을 떠난 뒤에는 그 장소를 다시 찾지 않으셨다. 이 사례는 우리 종단이 땅이나 건물에 의해 매어있는 것이 아니라 종통에 의해 규정되는 것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도주님의 유명에 따른 유일무이한 종통계승자이신 도전님께서는 협의회 임원들의 난동을 피해 태극도장을 출궁하셔서 대순진리회를 새로 창설하셨다. 이 상황은 도전님의 이궁(移宮)에 따라 종통이 옮겨간 것이기 때문에, 태극도에서 대순진리회가 분파된 것이 아니라 도의 본체(종통)가 ‘태극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가 ‘대순진리회’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즉 우리 종단이 태극도라는 외형적 모습(명칭이라든가 건물, 터 등)에서 대순진리회라는 외형적 모습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이다. 『대순진리회요람』에 ‘종단 대순진리회를 창설(創設: 처음으로 만들어짐)’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28 이것은 ‘분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종단의 외형적 모습이 새롭게 갖추어진 사실을 묘사하고 있는 것뿐이다.
3. 무극과 태극의 관계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무극도에서 태극도가 나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 몇몇은 무극에서 태극이 나왔기에 무극도에서 태극도가 나온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그러나 ‘무극에서 태극이 나온 것’이라는 철학적 논변(論辯)이 ‘무극도에서 태극도가 나온 것’이라는 종단 문제로 연결된다는 설정 자체에 이미 무리가 있다. 또 무극도에서 태극도가 나온 것도 아니다. 게다가 대순진리회에서는 무극에서 태극이 나왔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전자의 이야기는 이미 마쳤으므로, 이제 후자인 무극과 태극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살펴보도록 한다.
(1) 대순진리회에서의 무극과 태극
유학자들은 무극에서 태극이 나온 것인지 아니면 무극과 태극이 같은지 하는 문제를 결론내지 못한 채 거의 800년 이상 계속 논쟁해 왔다.
① 원래 무극(無極)은 우주의 가장 근원적이며 형체도 모양도 없는 본체로서 우주 본질의 무형(無形)한 측면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노자(老子)로서 『도덕경(道德經)』에 그 용어가 보인다.
知其白 守其黑 爲天下式 爲天下式 常德不 復歸於無極(그 밝은 것을 알고 그 어두움을 지키면 천하의 모범이 되고, 천하의 모범이 되면 상덕(上德)에서 어긋나지 않고 무극(無極)에 복귀한다).29
여기에서 무극은 ‘만물이 근본적으로 돌아가야 할 근원적인 도’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이 말은 도가(道家)에서 우주의 본원(本源)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인식되었다.
또 태극(太極)이란 우주 만물이 생성·전개되는 시원(始原)·근원으로서 천지가 아직 나누어지기 전 태초의 본원이자 동시에 우주 만물이 생성되고 순환하는 원리라는 뜻까지도 모두 포함하는 철학적 개념이다. 태극은 송나라 때 주렴계(周濂溪, 1017~1073)가 저술한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우주의 궁극적 존재 근원으로 언명되면서부터 거의 천 년간 유학에서 중요한 철학 개념으로 자리 잡아 왔다.30 이 말은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 八卦定吉凶 吉凶生大業(역에는 태극이 있다. 태극은 양의를 낳고 양의는 사상을 낳고 사상은 팔괘를 낳고, 팔괘는 길흉을 정하니, 길흉은 대업(인간 만사에 존재하는 길흉을 다스리기 위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큰 법)을 낳는다).31
『주역』이 원래 유가(儒家)만의 전유물은 아니었지만 공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에 의해 그 내용이 크게 증설되고 사서삼경에도 포함되었기 때문에 유가의 고유한 서적이라는 이미지를 대내외적으로 주게 되었다. 도가(道家)의 『장자』에도 ‘태극’이라는 단어가 보이기는 하지만 이때는 만물의 근원을 나타내는 철학 개념이 아니라 공간적으로 가장 끝이라는 뜻에 지나지 않았고,32 그 외에도 부분적으로 도가에서 태극 개념을 끌어다 쓴 적이 있기는 했지만 전통적으로 태극이라는 용어는 유가적 분위기가 더 강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유가(儒家)의 용어로 받아들일 수 있다.
<여주본부도장의 포정문. 벽면에 대순진리회 창설유래에 관한 글귀가 적혀 있다.>
② 무극과 태극은 각각 도가(道家)와 유가(儒家)의 용어이면서 동시에 우주의 근본을 뜻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다. 대순진리회에서는 도가(道家)의 무극이나 유가(儒家)의 태극을 서로 같은 개념으로 설정한다. 그것은 여주본부도장의 포정문(布正門) 옆에 새겨진 대순진리회의 창설 유래에서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대순(大巡)이 원(圓)이며 원(圓)이 무극(無極)이고 무극(無極)이 태극(太極)이라. 우주(宇宙)가 우주(宇宙)된 본연법칙(本然法則)은 그 신비(神秘)의 묘(妙)함이 태극(太極)에 재(在)한 바 태극(太極)은 외차무극(外此無極: 이[此] 바깥으로는[外] 극진함[極]이 없음[無])하고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진리(眞理)인 것이다. 따라서 이 태극(太極)이야말로 지리(至理)의 소이재(所以載: 실려 있는 곳)요, 지기(至氣)의 소유행(所由行: 운행시킬 수 있는 곳)이며 지도(至道)의 소자출(所自出: 나오는 바)이라.
… (중략) …
오직 우리들 가르침을 받드는 신도(信徒)와 인연(因緣)을 받고저 하는 중생(衆生)은 마땅히 수문수득(隨聞隨得: 따라가 듣고 본받음)하여 체념봉행(體念奉行: 직접 생각하고 받들어 행함)으로 각진기심(各盡其心: 각기 그 마음을 다함)하며 각복기력(各服其力: 각기 그 힘을 씀)하여 대덕(大德)을 계승(繼承)하고 대도(大道)를 빛나게 하여 대업(大業)을 넓힘으로써 대순(大巡)하신 유지(遺志)를 숭신(崇信)하여 귀의(歸依)할 바를 삼고저 함이 바로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를 창설(創設)한 유래(由來)인 것이다.33
이 글은 도주님께서 내려주신 「취지서(趣旨書)」에 바탕하고 있다. 「취지서」가 처음 간행된 곳은 1956년에 발행된 『태극도통감(太極道通鑑)』이다. 이 문헌의 발행인은 ‘도인 대표 박경호(朴景浩)’이다. 도전님은 죽산(竹山) 박씨(朴氏)34이요, 존휘는 한경(漢慶), 존호는 우당(牛堂)이신데, 원명(原名)이 경호(景浩)이셨다. 즉 『태극도통감(太極道通鑑)』을 발행하신 분은 바로 도전님이셨던 것이다. 도전님께서 도주님으로부터 도전(都典) 직책을 부여받고 종통을 계승하신 때가 1958년인데, 1956년에 이미 도인들을 대표하고 계셨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어쨌든 1956년에 발행된 『태극도통감』은 도전님께서 도주님의 뜻을 받들어 간행하신 것이 분명하므로 연구 자료로 삼기에 손색이 없다.
여기에 실린 「취지서」와 포정문의 글을 비교해보면, 「취지서」는 한문이고 포정문의 글은 한글로 풀어쓴 점이 차이가 있을 뿐 그 내용은 동일하다. 다만 첫 구절 ‘대순(大巡)이 원(圓)이며 원(圓)이 무극(無極)이고 무극(無極)이 태극(太極)이라’는 부분이 추가되어 있고, 마지막 구절 ‘태극도를 창설한 유래’가 ‘대순진리회를 창설한 유래’로 바뀌어 있다는 점만 다르다. 바뀐 부분은 모두 도전님께서 해 놓으신 것으로서, 이에 따르면 ‘대순=원=무극=태극’의 관계가 틀림없다.
③ 또 도전님께서는 훈시(訓示)를 통해서도 무극과 태극이 서로 같은 것임을 밝혀주셨다.
모든 것이 진리 안에 다 들어 있다. 대순(大巡)이라 함은 막힘이 없다는 것이다. 대순이 무극이요, 무극이 대순이요, 무극이 태극이요, 태극이 무극이다. 태극이 무극에서 나왔다는 것이 아니다. 전 우주의 모든 천지일월이라든지 삼라만상의 진리가 대순, 태극의 진리다. 상제님 말씀을 가지고 정성하고 또 정성하면 삼라만상을 곡진이해하고 무소불능이 된다.(1991년 1월 3일)
우리 종단의 명칭은 ‘大巡眞理會’이다. 대순은 동그라미다. 원(圓)이고 막힘이 없다. 진(眞)은 진리(眞理)의 진이다. 대순은 큰 大, 돌 巡 해서 크게 돈다는 것이다. 각(角)은 가다가 보면 꺾이고 막히는 데가 있다. 원은 걸리는 데도 막히는 데도 없다. 이것을 대순이라 한다. 원이 무극이다. 무극은 끝이 없다. 극이 없다. 태극은 무극이란 말과 동일하다. 태극의 太는 클 태이다. 대순은 아주 무궁무진하고 한이 없고 헤아릴 수 없는 무량한 것이다. 대순진리회는 크게 도는 참된 진리이다. 이것이 해원상생의 원리다.(1991년 9월 19일)
<1956년에 발행된『태극도통감』. 좌측은 표지이고, 중간은「취지서」이며 우측은『태극도통감』의 끝부분이다.>
따라서 유학에서는 무극과 태극이 같다 다르다 하는 논쟁이 벌어져도 대순진리회 안에서는 무극과 태극은 서로 같은 것이기 때문에 별다른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도 그랬듯이 우리 주변에는 의외로 무극에서 태극이 나온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 문제에 대한 대순진리회의 입장이 분명하건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추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무극 태극 논쟁이 벌어진 발단과 그 전개 과정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2) 진박과 주렴계
도가(道家) 『도덕경』의 무극과 유가(儒家) 『주역』의 태극을 서로 연결시켜 무극 태극 논쟁의 최초 씨앗을 심은 인물은 당말(唐末) 송초(宋初)의 진박(陳搏, ?∼989?)35이다.36 진박은
無極者 太極未判之時 一點太虛靈氣 所謂 視之不見 聽之不聞也(무극은 태극이 아직 나타나기 이전 한 점의 텅 비고 신령스러운 기운으로서 이른 바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다).37
라고 하여 무극을 태극보다 앞서는 개념으로 설정하였다. 그가 비록 유가의 사상을 잘 알았고 유불도(儒彿道)를 통합하려 했다고 하지만 본래 신선(神仙)의 조사(祖師)로 불리며 평생을 화산(華山)38에서 수도에 몰입한 도가의 사람이었다. 도가 사람인 진박으로서는 유가에서 말하는 우주의 근원 태극보다 도가에서 말하는 우주의 근원 무극이 먼저라고 언급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진박의 이론은 후대 주렴계에게도 영향을 주었다.39 주렴계는 도가와 불가(佛家) 사상의 영향을 받았으며 ‘신유학(新儒學)의 선구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주렴계는 유명한 그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이렇게 말했다.
無極而太極, 太極動而生陽, 動極而靜, 靜而生陰, 靜極復動. 一動一靜, 互爲其根, 分陰分陽, 兩儀立焉, 陽變陰合, 而生水火木金土, 五氣順布, 四時行焉, 五行一陰陽也, 陰陽一太極也, 太極 本無極也(무극이면서 태극이니, 태극이 움직여서 양(陽)을 생성하고, 움직이는 것(動)이 지극해서 고요(靜)하며, 고요함이 음(陰)을 낳고, 고요함이 지극하면 다시 움직인다.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한 것이 서로 그 뿌리가 되고, 음으로 나뉘고 양으로 나뉘어 두 가지 모양이 서게 된다. 양이 변해 음을 합하여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가 생성되며, 이 다섯 가지의 기운이 골고루 펼쳐져 사계절(四時)이 행해진다. 오행(五行)은 하나의 음양이요,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니,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주렴계 역시 진박과 마찬가지로 무극과 태극을 서로 연결하였지만, 진박처럼 무극에서 태극이 나온 것이라 하지 않고 무극과 태극은 서로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에 대한 더 상세한 설명은 적어놓지 않아서 후대 학자들에 의해 논쟁이 벌어질 여지를 남겼다.
(3) 주자와 육상산
무극 태극 논쟁을 촉발시킨 장본인은 주자(朱子, 1130~1200)와 육상산(陸象山, 1139~1192)이다.40 1187년 겨울, 육상산(당시 49세)은 무극 태극에 대해 토론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주자(당시 58세)에게 서신으로 알렸다. 그러나 주자는 그 다음해인 1188년 2월 무극과 태극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정립한 『태극해의(太極解義)』와 『서명해의(西銘解義)』를 내면서, 자신이 20년 동안 연구한 내용이므로 무극 태극에 대해서는 더 이상 토론할 여지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럼에도 2개월 뒤에 육상산은 주자에게 무극 태극을 논하는 첫 번째 편지를 보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주자는 이 편지를 6월 하순에야 받아볼 수 있었는데, 토론의 여지가 없음을 천명했던 그는 고민 끝에 11월에야 답신을 보냈다. 이후 다음해 8월까지 서로간에 몇 통의 편지가 더 오고갔지만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이 논쟁은 그냥 끝나버리고 말았다.
약 18개월에 걸친 서신 왕래를 종합해보면 논쟁이 되었던 부분은, 첫째 과연 주렴계가 『태극도설』을 지은 것이 맞는가, 둘째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에서 무극이라는 말이 필요한 것인가, 셋째 무극, 태극에서 극(極)은 중(中)의 의미인가 아니면 지극(至極)의 의미인가, 넷째 무극에서 태극이 나왔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이 논쟁 전체를 다루려면 내용이 복잡하므로 이 글에서는 넷째 문제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육상산은 주렴계가 도가 사상을 익혔고 또한 무극이라는 말은 원래 도가의 용어일 뿐 유가에는 없는 용어라는 점을 들면서,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무극은 태극이다)’을 ‘자무극이위태극(自無極而爲太極: 무극으로부터 태극이 나왔다)’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주자는 도가 철학에서는 유(有)와 무(無)를 둘로 나누어 보지만 주렴계는 하나로 보고 있기 때문에 태극과 무극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의 무극은 ‘무궁(無窮)’의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반박하였다. 즉 ‘무극이태극’을 ‘무궁무진한 태극’으로 해석하여 ‘무극’은 ‘무궁무진’이라는 뜻으로서 태극을 수식하는 하나의 형용사 차원으로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가와 도가의 사상을 익혔지만 철저하게 이 사상들을 배격했던 주자로서는 무극에서 태극이 나왔다는 것을 인정해버리면 우주의 근본에 대해서 도가가 유가보다 더 본질적인 차원의 개념을 설정했다는 것을 허용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이는 유학자로서 허락할 수 없는 문제였다. 주자가 도가 철학 개념인 무극과 유가 철학 개념인 태극은 서로 관계가 없으며, 주렴계가 「태극도설」에서 ‘무극’이라는 말을 쓴 것도 도가의 무극을 말한 것이 아니라 태극이라는 말을 꾸며주기 위해 ‘무궁무진’이라는 뜻으로 쓴 것일 뿐이라고 항변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주자에게 있어서 무극 태극 논쟁은 도가에 대한 유가의 자존심 문제였던 것이다.
이에 반해 같은 유학자이기는 하지만 학문에 대해 좀 더 유연한 입장이었던 육상산은 신유학의 창시자 주렴계가 도가 철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유가 철학인 태극보다 도가 철학인 무극이 더 앞서는 개념이라고 말하고 있다. 서로가 입장을 바꾸지 않는 가운데 이 논쟁은 끝나버렸고, 이후 거의 800년 이상 주자 신봉 학자들과 육상산 신봉 학자들 사이에서 이 논쟁은 계속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517년∼18년 사이에 이언적(李彦迪, 1491~1553)과 조한보(曺漢輔, ?∼?)가 무극 태극 논쟁을 벌인 일은 유명하다.
(4)모기령의 실수와 그 이후41
무극 태극에 대한 주자와 육상산의 입장이 다른 가운데, 최근에는 무극에서 태극이 나왔다는 육상산의 주장이 크게 득세를 하고 있다. 김병환은 주자학 연구를 대표하는 서적으로 평가받는 후외로(候外廬, 1903~1987)42의 『송명리학사(宋明理學史)』나 진고응(陳鼓應, 1935∼)43의 『역전여도가사상(易傳與道家思想)』, 장입문(張立文, 1935∼)44의 『송명리학연구(宋明理學硏究)』같은 유명한 서적들이 ‘無極而太極(무극과 태극은 같다)’으로 시작되는 주렴계의 『태극도설』 첫 마디를 아예 ‘自無極而位太極(무극에서 태극이 나왔다)’으로 단언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 학자들은 주자와 동시대의 인물 홍매(洪邁, 1123∼1202)45가 저술한 『송사』 「주돈이46」전에 실린 주렴계의 『태극도설』에 ‘자무극이위태극’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근거로, 무극에서 태극이 나왔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학계의 영향력이 큰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해 왔기 때문에, 국내외의 많은 학자들은 무극에서 태극이 나왔다는 입장을 지지하게 되었다. 최근 간행된 논문들이나 서적들 절대 다수가 무극에서 태극이 나왔다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 취급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병환은 이 학자들이 ‘자무극이위태극’을 고집하는 이유가 결국은 청나라 초엽의 학자 모기령(毛奇齡, 1623∼1716)47 때문이라고 한다. 후외로, 진고응, 장입문 같은 대가들의 주장도 원래는 모기령에 의해 제기된 설이었다는 것이다. 모기령은 홍매가 쓴 『송사』 「주돈이」전에 실린 주렴계의 「태극도설」에 ‘자무극이위태극’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으나, 홍매가 쓴 『태극도설』 판본 대신 주자가 ‘자(自)’와 ‘위(爲)’ 두 글자를 삭제하여 ‘무극이태극’으로 바꾸어 놓은 ‘장사건안본(長沙建安本)’을 주렴계의 『태극도설』 표준으로 널리 퍼뜨렸고, 그 결과 ‘무극이태극’으로 잘못 알려지게 되었다고 주장한 인물이었다.
물론 주자는 『대학(大學)』의 고전을 수정한 전례가 이미 있었기 때문에,48 그가 주렴계의 원래 저작도 뜯어 고쳤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는 있다. 하지만 주자(당시 59세)는 1188년 홍매(당시 66세)가 쓴 『송사』 「주돈이」전을 보고 거기에 실린 『태극도설』에 ‘무극이태극’ 대신 ‘자무극이위태극’이라 적혀 있는 것을 보고는 이미 전해져 내려오는 『태극도설』에 ‘무극이태극’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왜 엉뚱하게 기록하였는가 힐난한 사실이 있다. 그리고는 홍매에게 원래 전해져 내려오는 대로 ‘무극이태극’으로 수정할 것을 거듭 요구하였지만 끝내 관철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戊申(1188년) 6월, 나(주희)는 옥산에서 한림학사 홍매를 만나 그가 편수하고 있는 『국사(國史)』를 얻어 볼 수 있었는데, 그 중에는 주렴계, 정명도와 정이천, 장횡거 등의 전기와 주렴계의 『태극도설』이 포함되어 있었다. 주렴계의 전기는 여기에서 처음으로 씌어졌으니 이는 사관이 주렴계의 중요성을 인정하였다는 것으로 그 공이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태극도설』의 본래 구절은 ‘無極而太極’인데 홍매는 ‘自無極而爲太極’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어떤 근거로 ‘自’와 ‘爲’ 두 글자를 첨가했는지 모르겠다. … 만약 이 두 자를 첨가한다면 주렴계같은 성인(聖人)에게 누가 되고 후학들에게 의구심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이에 두 글자를 삭제할 것을 요청했으나 불가하다고 한다.49
홍매가 비록 한림학사이자 황실에서 지정한 중국사 저술 학자이기는 했지만, 주자의 학문과는 대립되는 입장에 계속 서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원래 ‘무극이태극’이었던 『태극도설』을 주자와는 반대 입장인 ‘자무극이위태극’으로 변형시킨 게 아닌가 하고 김병환은 의심한다.50
또 주자는 1189년에 육상산에게 “근래에 홍매가 쓴 『송사』 「주돈이」전을 보았는데 거기에 실린 『태극도설』에는 ‘자무극이위태극’이라 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주렴계가 정말로 그렇게 썼다면 나는 무극에서 태극이 나왔다는 육상산 당신의 견해에 동의하고 더 이상 이견을 내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주렴계는 결코 『태극도설』에 그렇게 쓴 적이 없습니다”51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자무극이위태극’이라고 기록한 『태극도설』이 단 하나의 판본이라도 전해지는 것이 있다면 자신의 주장을 꺾을 것이니 보여 달라고 거듭 요구했다.
만약 그때 주자의 편지를 받은 육상산이 ‘자무극이위태극’이라고 쓴 『태극도설』 판본을 하나라도 제시했다면, 무극 태극 논쟁은 육상산의 승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육상산과 많은 그의 제자들, 그리고 『송사』 「주돈이」전에서 ‘무극이태극’을 ‘자무극이위태극’이라고 바꾸어 기록한 홍매마저도 아무런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주렴계 사후 110년 정도가 지난 주자와 육상산, 홍매 당시에 ‘무극이태극’이라고 쓰인 판본의 『태극도설』만 있었지, ‘자무극이위태극’이라고 적힌 판본은 단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원래 『태극도설』은 ‘자무극이위태극’이었고 그것을 주자가 마음대로 ‘무극이태극’으로 뜯어 고쳐 세상에 퍼뜨렸다는 모기령의 주장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후외로, 진고응, 장입문 등 저명한 학자들은 모기령의 주장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채 그냥 받아들였고, 따라서 무극에서 태극이 나온 것이 정설이라는 분위기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 결과 별다른 전문 지식 없이 논문이나 서적을 본 사람들이 필자처럼 무극에서 태극이 나온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4. 정리하며
부족하지만 필자는 이 글을 통해 무극도에서 태극도가, 태극도에서 대순진리회가 나온 것이 아니라, 무극도와 태극도, 그리고 대순진리회라는 세 개의 종단이 모두 종통이라는 하나의 핵심 매개체로 엮어진다는 점, 이 세 종단의 본질은 같다는 점, 결국 한 종단이 이름을 계속 바꾸어 온 셈이라는 점들을 설명하고자 했다.
상제님의 친자종도들에 의해 설립된 종교 단체가 많을 때는 100개가 넘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52 우리 종단은 그런 종단들과 같은 차원으로는 묶여져서도 또 이해되어져서도 곤란하다. 우리 종단은 도주님께서 상제님으로부터 종통 계승의 계시를 받아 창설되어졌다는 점에서 여타의 다른 종단들과 그 궤를 달리 한다.
우리 종단을 규정하는 핵심은 도장 건물이나 터 등 종단이 갖는 외형적인 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종통에 있다. 종통 즉 상제님-도주님-도전님으로 이어지는 계보와 그 속에서 유지(遺志)·유법(遺法)·유훈(遺訓)이 부정되지 않고 살아있을 때 비로소 종단은 종단으로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이 종통은 종단 무극도와 태극도를 거쳐 현 대순진리회에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런 사실에 기반할 때 무극도에서 태극도가 나왔다거나 혹은 태극도에서 대순진리회가 나왔다는 차원으로 종단의 변천이 이해되어져서는 곤란하다. 무극도와 태극도는 도의 본체가 지나온 자취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종통(도의 본체)은 무극도·태극도·대순진리회를 통해 이어져 내려왔고, 1925년부터 1941년까지의 무극도나 1948년부터 1968년까지의 태극도, 1968년부터 지금까지의 대순진리회가 차례차례 도(道)를 현현(顯現)해 왔다는 점에서 이 세 종단은 모두 본질적으로 같은 종단으로 봐야 한다. 결국 하나의 종단이 차례차례 그 외형적 모습을 변화시켜 왔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무극도가 곧 태극도요, 태극도가 곧 대순진리회가 된다는 것이다.53
현재 부산 감천에 태극도장이 아직도 남아있지만, 도의 본체 즉 종통이 태극도에서 대순진리회로 넘어왔기 때문에 1968년 이후로는 무극도에서 시작된 종단이 태극도를 거쳐 대순진리회라는 외부 모습을 갖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부산 감천의 태극도장은 도의 본체가 사라진 채 다만 옛 건물들만 남아있는 유적지로서 이해할 수 있다.
무극도에서 태극도가 나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일부가 그 주장의 근거로 삼는 무극에서 태극이 나왔다는 말도 대순진리회에서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대순진리회에서는 도가에서 말하는 우주의 본원인 ‘무극’과 유가에서 말하는 우주의 본원인 ‘태극’이 서로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여주본부도장의 포정문에 새겨진 ‘대순이 원이며 원이 무극이고 무극이 태극이라’ 즉 ‘대순=원=무극=태극’이라는 글귀는 무극과 태극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그럼에도 일부 사람들이 무극에서 태극이 나온 것으로 오해를 하게 된 이유는 청나라 모기령의 잘못된 연구로부터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쓴 논문이나 서적들이 시중에 많이 출간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대순진리회의 종통은 도전님에게까지만 이어졌고, 도전님께서는 대순진리회라는 종단에서까지만 인세(人世)의 일을 보셨기 때문에, 우리의 종단은 대순진리회에서 그치고 더 이상의 변천은 있을 수 없다는 점도 상기해야 한다. 앞으로 그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종통을 바르게 알며 유지와 유법, 유훈을 따르고 대순진리회를 지켜나간다면 도통과 운수를 받는 마지막 순간을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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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대표적으로 『우주 변화의 원리』(한동석, 대원출판, 2001, p.382)를 들 수 있다.
02 現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문대학 인문학부 철학전공 부교수
03 퇴계학연구원, 『퇴계학보』 Vol 93, 1997, pp.126∼134
04 한국외국어대학, 『인문학연구』 Vol 6, 2001, pp.83∼107
05 『대순진리회요람』 p.5
06 『대순진리회요람』 p.12
07 現 전북 정읍시 태흥리 삼리마을 524-1번지
08 『대순진리회요람』 pp.9∼13, 四. 沿革 참고
09 상제님 재세 시 상제님을 직접 뵙고 따라다니던 종도.
10 구천상제님의 계시를 받으신 도주님께서 종통을 세우셨다.<80.7.22>(『대순지침』, p.13)
11 1968년 6월 25일자 『태극도 월보』 p.7 참고. 시봉원 책임자 도전으로 최초로 된 사람은 이윤섭이었고, 오치국은 두 번째로 도전이 된 사람이었다.
12 도주님 화천 후 이 세 사람은 따로 처벌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들 3인은 작당하여 1959년에 도의 재산인 협동상회를 ‘협화산업주식회사’로 명의를 변경하여 그들의 소유로 만들어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협화산업은 태극도 재산으로 환원되었고 이 일로 인해 이들은 모두 제명되었다.
13 도주님을 존칭하는 말. 당시 수도인들은 도주님을 옥황상제님이라고는 부르지 않고 도주님, 정산(鼎山)님, 지존(至尊)님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14 태극도 시절에는 내수(內修)·외수(外修)라는 말이 없었고, 임명을 모시지 않은 평도인인 경우 모두 수반이라고만 불렀다.
15 공부는 도주님께서 화천하시기 불과 석 달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16 이상은 태극도에서부터 수도하여 온 대순진리회 상급 임원들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17 원래 대체 임원은 포감 하나밖에 없었으나, 1956년경 도주님께서 포장과 호장 두 가지로 바꾸셨다.
18 각주 11.
19 도전님을 말함.
20 1968년 1월 25일자 『태극도 월보』 p.7
21 이 말은 1968년 6월 25일자 『태극도 월보』 「협의회와 도전 부전의 권한 관계」에 실린 것이지만, 이것이 논리성과 객관성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평소 생각을 정리한 말이라는 점에서 이런 주장을 이전부터 해오고 있었던 것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22 각주 11.
23 『대순지침』, pp.13~14 / 『대순회보』 5호, p.2(1986.10.28 훈시) / 『대순회보』 10호, p.2(1988.10.10 훈시) 참고. 상제님의 유지가 하나의 일정한 진리 체계로 구체화된 것이 유법 즉 진법(眞法)이며, 그 진법이 바르게 시행되기 위한 가르침이 유훈이다. 유지, 유법, 유훈의 관계는 이와 같이 규정된다.
24 『대순회보』 5호, p.2
25 각주 8.
26 교운 2장 20절 참고.
27 김성수, 「증산계 종단 연구의 문제점: 無極道 해산 시기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종교문화학회 창립기념 국제학술대회』 Proceedings, 동아시아종교문화학회, 2008, pp.287∼290 / 『대순회보』 85호, pp.24∼28
28 『대순진리회요람』 p.13
29 『도덕경』 제28장
30 성리학자들은 태극을 우주 만물의 리(理) 또는 기(氣)로 설명함으로써 태극에 대한 철학을 전개해 나갔다. 성리학은 천지가 생성되어 나오는 과정을 이기론(理氣論)으로 설명하는데, 이에 따르면 리(理)는 우주의 법칙·원리이자 사물 생성의 본체로서 형이상(形而上)의 것이고, 기(氣)는 직접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사물의 구체적 성질이자 사물 생성의 질료로서 형이하(形而下)의 것이라 한다. 성리학에서는 리(理)와 기(氣)의 선후(先後) 문제 등 여러 가지 사변(思辨)들이 다양하고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31 『주역』 「계사전」 상
32 김낙필, 「도교의 圓 상징과 무극·태극」, 『원불교학』 Vol 1, 한국원불교학회, 1996, pp.68∼69 /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夫道有情有信 無爲無形 可傳而不可受 可得而不可見 自本自根 未有天地 自古以固存 神鬼神帝 生天生地, 在太極之上而不爲高, 在六極之下而不爲深, 先天地生而不爲久, 長於上古而不爲老(무릇 도는 실제로 나타난다는 작용이 있고, 그것이 존재한다는 증거도 있으나, 행동이 없고 형체도 없다. 그것을 전할 수는 있으나 물건처럼 주고받을 수는 없다. 터득할 수는 있으나 볼 수는 없다. 스스로 모든 존재의 근본이 되어 있고, 천지가 아직 생기기 전의 옛날부터 본래 존재하며, 귀신이나 상제를 영묘하게 하며, 하늘과 땅을 낳고 있다. 가장 높은 곳(太極)보다 더 위에 있으면서 높은 척하지 않고 가장 깊은 곳보다 밑에 있으면서 깊은 척하지 않는다. 천지보다 먼저 생겨났으면서도 오랜 세월이라 여기지 않고, 까마득한 옛날보다 더 오래되었으면서도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 해석은 안동림이 번역한 『장자』(현암사, 1973)를 참고하였으며, 최근에 번역된 『장자』는 여기에 나오는 태극을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우주의 시원으로서의 태극으로 오인하여 잘못 번역해 놓은 것이 많으니 주의를 요한다.
33 해설은 필자가 주를 단 것임.
34 죽산 박씨 35세손, 문헌공파(文憲公派)로는 19세손이 되신다.
35 중국 북송 초기의 저명한 도사. 도호(道號)는 희이(希夷). 하남성 녹읍 출신.
36 경희태, 『道敎與中國傳統文化』, 복건인민출판사, 1989, p.140
37 각주 32 김낙필의 글, p.70 재인용
38 서악(西岳)을 말함. 섬서성 위수 근처 소재. 2,347m
39 『송사』 「유림전」 주진(朱震, 1072∼1138)의 전기에 따르면, “주진의 경학은 깊고 진실했는데 그는 『한상역해(漢上易解)』에서 ‘「선천도」는 진단이 충방에게, 충방은 목수에게, 목수는 이지재에게, 이지재는 소옹에게 전했다. 「하도낙서」는 충방이 이개에게, 이개는 허견에게, 허견은 범악창에게, 범악창은 유목에게 전했다. 목수는 「태극도」를 주돈이에게 전했다.’고 했다.”(풍우란 저, 박성규 옮김, 『중국철학사』 하, 까치글방, 2007, pp.444∼445)
40 9살의 나이차가 나는 이들이 처음 만난 곳은 아호사(鵝湖寺: 강서성 연산현)였다. 그 해는 1175년으로 당시 주자(46세)는 학문으로 명성을 얻어 이미 학계의 주류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육상산(37세)은 명성을 이제 갓 얻기 시작하던 때였다. 아호 모임에서 두 사람은 학문하는 방법에 대한 논쟁을 벌였는데, 간단히 말해 육상산은 학문을 닦는 것이 수양의 기본 공부가 아니라고 주장했고, 주자는 학문을 닦는 것이 수양의 기본 공부가 된다는 입장이었다. 비교적 간단한 논쟁이었으나 서로가 한 발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철학 사유 전반에 대한 본격적 논쟁은 시작되지도 못한 채 3∼4일 만에 아호 모임은 끝나고 말았다. 두 사람이 아호 모임에서 논쟁을 벌일 때는 서로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모임이 끝난 뒤에 육상산이 수양을 위해서는 학문도 닦아야 한다는 쪽으로 자신의 입장을 철회했고, 주자도 그간 학문만을 강조한 나머지 인격 수양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던 점을 반성하며 역시 한 발자국 물러서는 입장을 취했다. 이후 두 사람은 화기애애하게 지내는 듯 했으나 근본적으로는 유학에 대한 서로간의 입장차를 가지고 있었기에 상대의 학문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진래 지음, 이종란 외 옮김, 『주희의 철학』, 상지사, 2002, pp.423∼492)
41 이 장은 각주 3과 각주 4의 글을 많이 참고하였음.
42 중국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명예소장, 서북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중국의 대표적인 역사학자 중 한 사람.
43 복건성 장정 출신. 북경대와 대만대 철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도교와 주역 연구로 명성을 얻음.
44 절강성 영가 출신. 중국인민대학 철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철학 전반과 유학 연구로 유명.
45 자는 경로(景盧), 호는 용재(容齋). 시호는 문민(文敏). 지방의 여러 벼슬을 역임하다가 나중에 한림학사가 되었다. 폭넓은 독서가였으며, 정치·사회·사상·역사·풍속·예술·의학·천문·수학 등 모든 방면의 사상에 관한 고증 연구를 하였다.
46 주렴계를 말함. 본명이 주돈이(周敦)이며, 염계(濂溪)는 그의 호이다.
47 자는 대가(大可), 본명은 신() 또는 초청(招請). 명이 망하자 산 속으로 들어갔으나, 강희 17(1678)년에 박학홍유(博學鴻儒)에 응시하여 한림원 검토에 임명되어 명사(明史) 편찬에 참여하였다.
48 「대학에 대하여」 1, 『대순회보』 65호, p.16
49 「記濂溪傳」, 荒木見悟 主編, 『晦庵先生朱文公文集』 下, 臺北 文化書局, 1985, p.5158
50 김병환은 중국 역사에서 사가(史家)의 주관적인 관점으로 중국 역사의 기록을 바꾸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지적한다.
51 「記濂溪傳」, 荒木見悟 主編, 『晦庵先生朱文公文集』 上, 臺北 文化書局, 1985, pp.2296∼2297
52 김홍철 외, 『한국신종교실태조사보고서』,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97, p.152
53 물론 여기에서 태극도는 도전님께서 출궁하시던 1968년까지의 종단만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