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구한 발자국 - 만동묘 편

포토영상비상 (날개) 2020 冬

 

 

<전경 교운2장 50절>

 

갑오년 三월에 도주께서 안 상익(安商翊) 외 네 명을 대동하고 청천에 가셔서 황극신(皇極神)이 봉안되어 있는 만동묘 유지(遺址)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오셨는데 돌아서실 때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밤중에 폭풍과 뇌성벽력이 크게 일어 산악이 무너지는 듯하니라. 다음날에 숭정 황제 어필(崇禎皇帝御筆)의 비례부동(非禮不動)이 새겨 있는 첨성대 아래쪽 암벽의 좌편에 닫혀 있던 석문(石門)이 두 쪽으로 갈라져 내리고 그 안의 옥조빙호(玉藻氷壺)의 네 자와 만력어필(萬曆御筆)의 네 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전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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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어필 옥조빙호 (萬曆御筆 玉藻氷壺)

 

이 글은 명나라 만력제(萬曆帝: 신종)가 쓴 옥조빙호라는 의미이다.

 

옥조빙호의 어원을 보면, 옥조에서 옥(玉)은 면류관 앞뒤의 유(旒)에 늘어뜨린 옥이며, 조(藻)는 색실을 꼬아서 옥을 꿰는 데 쓰는 끈이다. 따라서 옥조는 비유적으로 쓰여 임금을 가리킨다. 그리고 빙호는 본래 얼음을 담는 옥 항아리이다. 그래서 옥조빙호는 임금의 마음이 차고 맑아야 한다는 정치 철학의 의미가 담겨 있다.

 

‘옥조빙호’라고 새겨진 석판에 대해 화양동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글이 나타난 이후 몇 년간은 계속 암벽에 붙어 있었다”고 한다. 원래 글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석문으로 봉인이 되어 있어서 어떤 사람도 알지 못했다. 석문이 갈라지고 글이 나타났을 때, 우인규라는 사람이 탁본14한 것이 현재까지 전해 오고 있다. 안타깝게도 ‘만력어필 옥조빙호(萬曆御筆 玉藻氷壺)’가 새겨진 석판은 누군가에 의해 사라지고 없다.

 

만동묘가 1703년에 건립되면서 200여 년(1703~1908) 동안 조선에서 명나라 황제 신종과 의종에게 극진히 제향(祭享)해 왔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상제님께서는 전경 공사3장22절에 “황극신이 이 땅으로 옮겨 오게 될 인연은 만동묘를 세움으로부터 시작되었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공사3장22절>

 

상제께서 어느 날 고부 와룡리에 이르사 종도들에게 “이제 혼란한 세상을 바루려면 황극신(皇極神)을 옮겨와야 한다”고 말씀하셨도다. “황극신은 청국 광서제(淸國光緖帝)에게 응기하여 있다” 하시며 “황극신이 이 땅으로 옮겨 오게 될 인연은 송 우암(宋尤庵)이 만동묘(萬東廟)를 세움으로부터 시작되었느니라” 하시고 밤마다 시천주(侍天呪)를 종도들에게 염송케 하사 친히 음조를 부르시며 “이 소리가 운상(運喪)하는 소리와 같도다” 하시고 “운상하는 소리를 어로(御路)라 하나니 어로는 곧 군왕의 길이로다. 이제 황극신이 옮겨져 왔느니라”고 하셨도다. 이때에 광서제가 붕어하였도다.

 

 


비상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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