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으로 유서 깊은 고부 땅에 대성인(大聖人)께서 오셨다
상제님의 탄강지(誕降地) - 문화재인 정읍시의 향토유산으로 지정
글 나종우 (문학박사·원광대 명예교수)
세상의 돌아가는 이치는 지금 우리가 잘 모르고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그냥 아무렇게나 운행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 가운데서도 무지하고 몽매(蒙昧)한 사람들이 성인(聖人)의 탄강(誕降)을 모르고, 설령 안다고 해도 그 가르침의 도(道)를 접하지 못하거나 접하더라도 자기 생각대로 도를 이해하려 한다면 이 또한 무지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상제님 강세지: 정읍시 향토문화유산(제22호)
예부터 사람들은 어느 시대든지 자신들이 사는 시대를 만족하면서 행복한 시대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오진 않았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든지 문제점과 모순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항상 유토피아(utopia : 理想鄕)를 그리며 살아왔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많은 문제를 앞에 놓고 해결하기 위해 머리 아파했다. 그러는 과정에 정말 해결하기 어렵다고 느끼게 되면 두 가지 방법에 눈을 돌리게 된다. 하나는 그 시대의 문제점과 모순을 타파하기 위한 힘을 합하는 일(민란, 혁명 등)과 또 하나는 어려움 속에서 구원해 줄 구원자인 구세주(救世主 : 聖人)를 기다리며 종교적 방법에 몰입(沒入)하면서 의지하고 때를 기다리는 방법이다.
예부터 사람들은 어느 시대든지 자신들이 사는 시대를 만족하면서 행복한 시대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오진 않았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든지 문제점과 모순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항상 유토피아(utopia : 理想鄕)를 그리며 살아왔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많은 문제를 앞에 놓고 해결하기 위해 머리 아파했다. 그러는 과정에 정말 해결하기 어렵다고 느끼게 되면 두 가지 방법에 눈을 돌리게 된다. 하나는 그 시대의 문제점과 모순을 타파하기 위한 힘을 합하는 일(민란, 혁명 등)과 또 하나는 어려움 속에서 구원해 줄 구원자인 구세주(救世主 : 聖人)를 기다리며 종교적 방법에 몰입(沒入)하면서 의지하고 때를 기다리는 방법이다.
이러한 19세기 시대적 상황 속에서 민중들이 기다리던 성인이 전라도 고부 땅에 오시게 되었다. 고부 땅은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정읍시 고부면의 작은 행정구역으로 표시되지만 대순 151년 전(1871)과 그 위로 거슬러 올라가서 좀 더 역사적으로 고부라는 지역의 명칭에 대하여 살펴본다면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마한제국의 하나인 고비리국(古卑離國)으로 출발한 고부는 영역국가인 백제 치하에서는 고사부리군(古沙夫里郡)으로 편입되었으며, 신라의 삼국통일 후 기존의 이 두 지명이 한자식으로 바뀌는 시점인 경덕왕대에 이르러서 고부라는 명칭을 부여받았다. 고려시대에는 한 때 영주(瀛州),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개칭되기도 하였으나 현종대에 고부라는 명칭을 되찾았다. 여하튼 고부군은 고려시기에는 7개의 속현을 관할하였으며, 한때는 정읍, 부안, 고창을 아우르는 큰 고을이었다.
한자로 되어있는 고부(古阜)라는 지역명의 뜻을 살펴보면 특히 부(阜)의 의미를 자세히 살펴본다면 클 ‘부’로 쓰면서 ‘부성조민(阜成兆民)’이라 하여 백성의 행복을 크게 이룬다는 의미가 있으며, ‘첫 발상지’, ‘태고로부터 크게 융성하다’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현대의 사회는 어떤 사회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사회와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사회는 어떻게 다를까. 이러한 물음에 현명하게 누가 답해 줄 것인가. 단적으로 말해서 지금까지의 사회는 예측 가능한 시대였다면 앞으로의 사회는 예측 불가능한 사회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공부 잘하면 좋은 학교 들어가고 좋은 학교 나오면 좋은 직장 들어가고 좋은 직장 들어가면 좋은 곳으로 결혼하고 등등 모두가 예측이 가능한 속에서 우리는 살아왔다. 물론 여기에서 좋다고 하는 것은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 바탕이 된 것을 말한다.
그러나 다가오는 시대는 과학발전도 그렇고, 생각지도 않은 전염병도 그렇고 시시각각으로 어떤 상황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인가의 두려움이 늘 도사리고 있다. 한마디로 어느 것 하나 예측 가능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평균 수명이 늘어난다고 하지만 모두의 수명이 늘어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암 수술을 해서 5년이 지나면서 괜찮다고 하는데도 항상 불안한 마음으로 안과에 가고, 심장전문의를 찾고 이비인후과를 찾고 병원을 순례하다시피 하신다. 항상 불안 속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하나의 걱정이 지나면 또 다른 걱정을 하고 마치 소나기 내릴 때 비 피한다고 뛰어가는 형국이다. 뛰어가면 비를 미리 맞을 뿐인데 말이다. 결국 현대인들은 마음의 안정을 갖지 못하니 매사가 불안하고 예측 할 수 없는 불안감에 두려움을 안고 사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예측 불가능한 사회를 살아가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아마도 참된 스승을 마음속에 모시고 의지하면서 현재의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이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된다.
이번에 상제님의 탄강지(誕降地)가 문화재인 정읍시의 향토유산으로 지정이 되어서 앞으로 상제님의 덕(德)을 널리 펴나가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사료 된다. 탄강하신 집터가 있는 마을 뒷산은 시루봉이라 하는데, 탄강하신 터나 마을 뒷산 정도로 이곳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탄강지가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다시 한번 그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그곳은 단순한 집터가 아니다. 우리가 외국에 나가면 유명한 문호나 화가 음악가 등의 생가를 둘러본다. 그리고 그들의 생을 생각하면서 나름대로 삶의 의미를 되새겨보기도 한다. 그러한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가 한 시대의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이곳 탄강지는 어떤 의미로 새겨야 할까. 단순한 한 시대의 성인이 아니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할 삶의 지혜를 깨닫게 하는 영원한 스승으로 모시는 의미를 새겨 볼 필요가 있다. 그곳은 상제님의 기를 받아 새롭게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 서서 마음을 모으면 강렬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곳으로 새겨야 한다. 그곳은 시대정신이 응집된 땅이다. 그곳을 어떻게 가꾸어 나갈 것인가. 생가를 복원하지 않았을 때와 복원한 뒤에 어떻게 가꿀 것인가. 보이지 않는 것에서의 상상력과 보이는 것에서의 상상력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이라 함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 미지(未知)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무너져 내린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그곳에서 일어난 경기를 그려보듯이 탄강하신 터에 서서 그곳에 사셨던 상제님을 그려보고 상제님의 가르침에 나를 일체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