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후반 일찍이 국제 무역에 눈을 뜨고 유럽의 문물과 접했던 일본은 새로운 군사기술을 받아들였다. 1590년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조선은 물론이고 중국을 복속시키고 아시아 전역을 하나의 체계로 지배하려는 야망을 불태우게 된다. 조선 침략은 아시아 전체를 손아귀에 넣는 첫 단계였다. 7년간의 전쟁은 선조와 광해군 당대에 정치, 경제, 사회 체제가 와해되는 전방위적 피해를 초래한 것은 물론 조선 후기부터 말기까지의 왕조의 전개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사실 우리 역사에서 이민족의 외침에 맞서 벌어진 전투나 전쟁은 무수히 많았으나 임진왜란만큼 통시적으로 대부분의 현대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에 영향을 준 전쟁은 많지 않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임란기는 수많은 위인이 나타난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임진왜란의 호국영웅 이순신은 세종대왕이나 일제강점기 항일투사들을 제치고 우리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매번 조사될 정도이다.
국민 대부분이 임진왜란은 선조를 비롯한 조정의 무능 때문에 발발했으며, 한 달 만에 한양이 함락되는 와중에 선조는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쳐 버렸고, 왜적의 무참한 살육과 약탈 앞에 무수히 많은 물적, 인적 피해를 입은 치욕의 전쟁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나마 전쟁의 종식도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참전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얻은 패배와 다름없는 전쟁으로 인식한다.
다시 말해, 전쟁의 인과(因果) 관계보다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 피어난 박애주의, 애민정신, 용기있는 저항과 희생정신과 같은 인간 중심의 이야기에 더 관심이 있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의 인물들의 행적이나 내적 고뇌에 대한 기록이나 스토리는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드라마, 영화와 같은 대중미디어로 제작되는 것은 물론 역사적 의미를 지닌 문화유산으로서 2013년 이순신이 일기형식으로 쓴 [난중일기]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서애 유성룡의[징비록]역시 기록유산으로 등재를 앞두고 있다.
▲ 충무공이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 동안의 일들을 기록한 『난중일기』. 전 7책 부록 1책으로 되어있다.
전술한 바처럼, 한국인 대다수가 임진왜란을 민족적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힌 ‘패전’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적어도 일본의 입장에서는 승리한 전쟁이어야 한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일본이 전쟁의 목적을 달성했는지 여부를 평가하면 실패한 전쟁이었다.
그 이유는 첫째, 영토 확장의 측면에서, 가도입명(假道入明)을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했으나 명나라는커녕 조선 영토의 일부분도 점령하지 못하였고, 둘째, 명과의 무역을 재개하고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일본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일본의 기대도 물거품이 되었다. 즉, 교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선점하려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국내 영주들의 불만을 대외적으로 해소해 국내정치의 안정을 도모하려던 시도, 그 어느 것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전쟁을 통해 많은 조선의 문물을 약탈하였지만, 이것이 침략의 주된 목표는 아니었다. 일본은 무리한 전쟁으로 민생은 피폐해졌고, 군사 중에는 배고픔을 못이겨 조선에 투항하거나 죽은 자도 많았다.
한편 일본 국내에서는 혼란을 틈타 봉건 제후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는 가운데 전쟁의 당사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그는 조선 침략에 반대해 왜란중에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정권을 잡자 조선과의 관계 회복을 도모하였다. 전장(戰場)이 되었던 조선은 전쟁을 수행하면서 막대한 국력을 소모하여 사회 체제의 붕괴를 피할 수 없었다. 민심은 이반하여 곳곳에 민란이 일어났으며 기근과 전염병의 창궐로 백성의 삶은 더욱 피폐해
졌다. 토지는 전란 이전에 비해 20%가 줄어들었다.
명(明)나라 역시 전쟁의 부작용을 극심히 겪게 되었다. 명은 은(銀)을 통화로 사용했는데, 전란이후 은 부족으로 재정 파탄에 시달렸다. 그 결과, 경기가 극도로 침체하게 되면서 이곳저곳에서 난이 일어났다. 명나라 조정은 농민 반란과 변방 소수민족의 봉기를 진압할 군비 확충에 실패하고, 결국 만주의 누르하치 이끄는 청(淸)에 의해 왕조 교체가 가속화하게 되었다.
이처럼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3국 어느 쪽도 얻은 것이 없는 상처뿐인 전쟁이었다. 전쟁은 살육, 강간, 약탈, 피랍 등 패전국 백성의 고통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승전국이라 해도 전쟁에 민중이 동원되고 군수물자 공급을 위해 민생은 참담한 상황에 처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런 점에서, 증산이 왜 선천세상의 ‘웅패의 술(術)’에 대해 비판하고, 생명을 살리는 ‘성웅’의 시대가 될 것을 주장했는지 역사를 통해 깨달을 수 있다.
전술한 것처럼 우리 국민은 당시 권력층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호국영웅이나 민초들에 대한 존경과 연민의 감정이 내재된 양가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반면, 대순진리회의 [전경]에 나와있는 증산의 임진왜란과 관련한 어록에서 일본은 오히려 임진왜란을 통해 삼한을 맺게 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특징적인 것은 통상적으로 한을 품는 주체는 주로 피해자인데 반해, 증산은 가해자인 일본을 한을 맺은 주체로 보았다는 점이다.
[전경]예시 74절에는 증산이 종도들에게 일본이 맺은 삼한에 대해 언급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증산은 당시 왜군은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였던 것이 첫 번째 한이고, 두 번째 한은 무고한 인명이 많이 살해되었던 것, 마지막으로 모심는 법을 가르쳤던 것이 세 번째 한이라고 말한다.
선조실록에는 왜의 침략후 불과 20일 만에 도성이 함락되고, 선조 일행은 새벽에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가운데 쫓기듯 도망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여러 공사의 과정에서, 증산은 ‘인간’이나 ‘신명’의 이동이나 동태, 또는 상호작용을 중시한다. 예를 들어, 청국에 있는 황극신이나 서양으로 넘어가 있던 도통신(道通神)을 다시 조선으로 불러들여 공사를 진행한다거나 풀잎 하나라도 신이 떠나면 마를 것이며 흙 바른 벽이라도 신이 옮겨가면 무너진다는 언급에서 신명의 이동이 변화를 추동하는 주요 기제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증산은 종도들을 비롯한 주변인들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킴으로써 다양한 공사를 수행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왕이 빠져나간 한양은 더 이상 왕기(王氣)가 머물지 않으며 선조의 피난처였던 의주가 잠정적으로 ‘서울,’ 즉 새로운 도성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실제로, 명나라 군대가 파병되어 일본은 의주 입성 직전 후 퇴하면서, 선조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일본은 훗날 대한제국을 강제합병하는 과정에서 첫 번째 한을 풀게 된다. 순종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 권신들과 일본의 압력으로 결국 1910년 8월 29일, 순종은 일본왕에게 합병을 청하는 방식으로 국권을 넘겨 주게 된다. 그 결과 일본은 서울에 무혈입성해 1916년부터 1926년까지 경복궁의 근정전과 광화문의 중심선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비롯해 경성부청, 조선신궁 등과 함께 식민지 경관을 완성하면서 식민 통치를 가속화한다.
두 번째 한은 임진왜란 당시 무고한 인명을 의도치 않게 대량살상하였음을 의미한다. 당시 100만 명이 넘은 조선인 인명피해와 10만여명이 포로가 되었다는 사료를 고려하면, 조선의 ‘완전한 점령’에 실패했음에도 인명이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 것을 포한(抱恨)의 이유로 들고 있다. 대순진리회 일각에서는 무고한 인명의 주체를 조선인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원을 품는 주체는 ‘피해자’라는 통념적이며 지엽적인 입장에서 한걸음 벗어나 다소 관조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일본군 역시 전체 전력의 최소 40% 이상이 피해를 입은 역사적 사실을 조망해 볼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 과정에서 일본군의 참전 병력수는 정확하지 않지만 다수의 사료에 따르면 일본군 참전 병력수를 15만 8,7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최대 29만 명까지 참전한 것으로 추정한다. 전사자 수도 일부 지역에서는 전력의 약 44%에서 60%가 넘었던 것으로 조사된다. 1592년 전쟁 발발 이후부터 1598년 이순신의 전사를 초래했던 노량해전까지 조선 수군은 수천 명의 인명손실이 있었지만 왜군은 노량해전에서만 200여 척이 격침되어 최소 3만여 명의 일본 수군도 수장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한편, 이 피비린내 나는 처참한 살육전에서, 증산은 침략자였던 왜군 역시 해원 대상으로 보고 있다. 전술한 것처럼, 포한(抱恨)의 주체가 주로 피해자에 국한되는 일반적 통념과는 달리 대순사상에서 해원의 대상은 어떤 사건의 가해자나 피해자, 인간이나 신명, 심지어 동물에까지 이른다. 이는 우주 만물의 조화와 운행을 주관하는 주재자로서, 증산의 포용적이며 광범위한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어쩌면 주군이 일으킨 전쟁에서 불가항력으로 끌려와 낯선 땅에서 죽은 자들 역시 윤리적 측면에서 보면, 가해자이기는 해도 억울하고 무고한 생명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들의 해원은 ‘만고의 원을 풀고 상생의 도’를 이루어 새로운 후천을 열기 위한 중요한 행위이다.
조선 조정은 1910년 일제의 통치가 시작되기 전까지 강화도조약, 을사늑약 등 외교권을 침탈당하며 군사, 경제, 정치적 압력에 무력하게 무릎을 꿇었다. 혼란한 국제 정세 속에서 관리들의 부패와 친일 행각, 왕실의 무능, 이에 따른 체제 붕괴와 기강 해이 등이 전방위적으로 겹친 결과였지만 조선은 사실상 나라를 고스란히 일본에 넘긴 것과 다름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청일간, 러일간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르며 엄청난 인명피해를 초래한 것에 비해, 일본 의 입장에서만 보면, 큰 인명피해 없이 비교적 수월하게 조선의 주권을 침탈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일제강점기 36년간 항일운동이나 강제징용 또는 징병으로 인해 조선은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으나 양국간 직접적인 전쟁을 통한 살상 목적의 손실이 발생했다고 주장하기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무력침공으로 인한 임진왜란의 인명피해와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우리나라로서는 불행한 근현대사의 시작이었으나, 이렇게 일본은 상대적으로 무고한 생명의 희생을 치르지 않고 식민통치가 가능하게 되면서 두 번째 한도 풀리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일본은 인명피해를 최소화하면서 ‘한반도’라는 물리적 공간의 상하부(上下部)인 ‘하늘과 땅’을 비롯해 그 안에 살아가는 모든 동물과 식물을 차지하고, 인간과 인간의 활동을 모두 통제하고 강제함으로써 한을 풀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 한의 해소는 인간의 존재와 우주의 상호작용, 자연의 법칙과 조화 등을 강조하는 핵심 개념인 ‘천지인(天地人)’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우리나라에는 ‘3’을 매개로 모든 대립을 하나로 아우르는 천지인 합일, 회삼귀일, 삼일 원리의 독특한 사유가 있는 것을 고려하면, 첫 번째 한의 해소 과정에서 지형, 기후, 생물과 같은 자연적 요소와 역사, 문화, 산업과 같은 인문적 요소가 깊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동안 한반도의 문화, 역사, 언어를 비롯해 다양한 측면에서 훼손 및 왜곡이 자행되었다. 예를 들면, 노동력 착취를 위한 강제징집, 강제징용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자라는 작물부터 삽살개, 범과 같은 동물 및 자연유산, 고서, 그림, 공예품 등의 유형문화재에 이르기 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산을 수탈하였다. 일본이 산속만이 아니라 깊숙한 섬 속까지 샅샅이 뒤졌고 또 바닷속까지 측량하였다는 증산의 언설에서 우리 국토와 영해까지 침탈하려는 일제의 치밀함이 드러난다. 심지어 공간적 훼손의 사례로 전국에 산재한 조선신사 그리고 철도(도로)나 쇠말뚝에 의한 단맥(斷脈), 경복궁을 비롯한 조선궁궐의 훼손 등이 있는데, 학계 일각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한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풍수적 의도’를 가지고 자행된 ‘풍수침략’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자료출처: 부산근대역사관 ‘근대의 기억, 학교에 가다’ 특별기획전 2011년 7월
마지막 세 번째 한은 벼농사와 관련된 문명사적 측면에서 조망해보려 한다. 일본이 이른바 못자리에서 일정 기간 모를 키운 후 본답에 옮겨 재배하는 농법인 이양법을 조선에 전수했다는 것이다. 여러사료에 따르면, 조선의 일부 지역에서 이양법이 이미 실행되고 있었지만, 임란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일본은 침략의 목적도 달성하지 못한 채 오히려 조선의 농업 생산성만 높여 주게 된 것이다.
아시아인의 대부분이 주식으로 삼고 있는 쌀은 매우 상호 의존적인 작물이다. 전근대시대 벼농사는 밀과 같은 건조지(dryland) 작물에 비해 훨씬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에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정착하게 되었다.
우임금 설화에서 보듯이, 국가가 농사에 필수적인 물을 얼마나 잘 관리하고 원활하게 공급할 수 있는가, 즉 국가의 치수 역량이 매우 중요하였다. 홍수 통제나 관개 시스템 운영은 작물에 대한 물 공급을 조절할 수 있게 해 주며, 건조 지역에서도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게 하였다. 이를 통해 식량 생산성이 증대되며, 관개 시스템은 날씨변동에 따른 농업의 취약성을 보완하여 일관된 수확량을 보장할 수 있다. 이는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하여 인구 증가로 이어진다. 풍부한 식량 공급은 어떤 문명이든 성장과 지속 가능성의 기본 요소이다.
광의적으로 보면, 벼농사는 인구 증가와 도시화, 경제, 사회의 발전과 문화와 지식의 발전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인류문명의 발전을 추동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또한, 쌀과 관련해 문화지리적 특성중 흥미로운 것은 과거 벼농사가 노동집약적이다 보니 노동 교환을 위한 규범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서양이 인간의 이성과 개인의 자유 및 자아실현, 인권의 가치를 강조하는 데 비해 아시아는 전통적으로 개인보다는 우주 중심의 세계관을 가지며, 철학적, 윤리 도덕적 가치를 지향하고 인간의 내적 성장을 추구해왔다. 이는 밀을 재배하는 서양보다 벼농사를 주로 하는 아시아의 도덕 규범이 더 엄격하며, 벼농사가 도덕률이 자연스럽게 스며든 사회로의 이행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방증한다.
동양의 벼농사와 서양의 밀농사를 비교할 때, 벼농사 지역에서의 노동 교환은 더욱 결속력이 있었으며, 밀농사의 경우 농부들의 결속력은 느슨한 대신 수확철에는 추수감사절 축제와 같은 행사를 통해 결속을 다졌다고 한다. 이러한 연구들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농사가 인류의 문화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시사한다.
1994년 충청북도 청주 소로리에서 발견된 볍씨, 일명 ‘소로리 볍씨’가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결과, 중국보다 무려 3천 년이 앞선 세계 최초의 볍씨인 것으로 드러난 바 있다. 이러한 사실은 한반도가 문명의 발상지중 하나로, 원시반본(原始返本)의 열쇠를 쥐고 있는 ‘시종(始終)’의 땅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벼농사의 발신지일 가능성이 높은 우리나라에 개선된 농업 기술까지 전수하게 된 일본은 사실상 의도치 않게 ‘적국’을 이롭게 한 결과를 초래한 셈이었다.
따라서, 증산이 언급한 세 번째 ‘한’의 인과는 단지 ‘식량의 증산(增産)’이라는 가시적인 경제적 성과뿐만 아니라 문명사적으로도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결국 조선 땅에는 한일합병전 3년 동안 (1908~1910) 극심한 흉년이 들어 “고한 삼년(枯旱三年)으로 백지강산(白地江山)이 되어 민무추수(民無秋收)”한다는 증산의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었다.
출처 : 대순종학 학술지 [5집] 수록논문 일부발췌
임진왜란(1592~1598)과 일본의 삼한(三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