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단주 원에 대한 그간의 해석들
단주의 원이 상제님의 해원공사 첫머리를 장식하는 원이었다면, 혹시 그 원에는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것이라는 의미를 넘어선 더 큰 어떤 가치가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 이 물음은 단주 원의 실체를 밝히는 작업을 통해 결론지어질 문제이다.
처음 한 동안은 ‘단주가 불초하다 하여 요가 순에게 두 딸을 주고 천하를 전하니 단주는 원을 품고’라는 상제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단주가 불초하다는 평을 ‘억울하게’ 들은 것과 더 근본적으로는 왕이 되지 못했던 것이 단주가 품었던 원의 실체라는 해설이 주류를 이루었다.06
그러다가 최동희는 『해원상생과 우리 일상 언어』(2009)라는 글에서 4,200여 년 전인 요임금 시절에는 군주세습제가 없었기 때문에 단주가 요임금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왕이 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만약 단주가 왕권을 빼앗긴 것에 대해 원을 품었다면 대순진리회가 겨우 그런 정도의 원을 가지고 원의 뿌리라고 강조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좀 더 깊이 있는 해석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나섰다. 덧붙여 그는 단주의 원이 당시 종족연맹체를 구성한 종족장들의 뒤얽힌 지배 체제에 대한 선구적인 비판의식, 저항심, 반감, 통치권에 대한 끈질긴 저항 때문에 발생했을지 모른다는 가설도 제시하였다.07
최동희의 지적대로 요가 지배하던 시절에는 임금의 자식이 왕위를 계승받는 군주세습제가 없었다. 군주세습제는 하나라의 시조인 우의 아들 계(啓)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므로 세습제가 없고 명망 높은 사람이 왕으로 추대되는 시절을 살았던 단주는 자신이 요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왕이 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최동희의 지적대로, 왕이 될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던 단주가 ‘뜻밖에’ 왕이 되지 못한 충격으로 해서 원을 품게 되었다는 기존의 해석은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단주의 원이 왕이 되지 못한 데서 나온 게 아니라면, 도대체 그가 가졌던 원의 실체는 무엇인가?’하는 문제가 새로운 쟁점으로 부각되려 할 때, 단주와 당시 지배층 사이의 갈등에 주목한 최동희의 입장과 유사한 연구가 시기적으로 거의 동시에 등장했다. 「선양인가? 찬탈인가?-고대 중국의 왕권신화에 대한 해체론적 접근」(2009)이라는 글을 쓴 정재서가 그 장본인인데, 그는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기 위해 먼저 요가 순에게 왕위를 넘겼다는 선양(禪讓)이 허구라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덕이 있는 자에게 왕위를 양보한다는 선양이란 게 역사적 진실인지, 아니면 폭력에 의한 찬탈을 미화하기 위한 장치인지 하는 논쟁은 이미 전국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 유가와 묵가는 선양을 지지했고 법가는 허구라고 반박했으며 그 논쟁은 비교적 최근인 청나라 때까지도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맹자』에는 요가 죽은 후에 순이 단주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갔고, 왕을 뵙고자 하는 제후들은 단주가 아닌 순을 찾아갔다는 기록이 있는데,08 그것은 순이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단주와 대립 관계에 있었음을 암시해준다고 지적했다. 결론적으로 정재서는 “요임금의 덕이 쇠하자 순임금은 요임금을 유폐하였다. 그리고 단주를 연금시켜 부자가 서로 보지 못하게 하였다.”, “후직을 시켜 단주를 단수에 추방시켰다.”는 『죽서기년(竹書紀年)』의 기록,09 순이 요를 추방했다는 『사통(史通)』의 기록,10 요국(堯國)의 도읍으로 추정되는 산서(山西) 양분(襄汾)의 도사(陶寺) 유적을 발굴(1978년)한 결과 궁전 등이 철저히 폭력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음을 거론하면서, 요가 순에게 천하를 주었지만 순은 요를 유폐시키고 단주도 연금시켰으며 요의 나라를 궤멸시켰을 가능성이 크다는 가설을 제시하기에 이른다.11 정재서의 연구는 기록의 진위 문제와 더불어 도사 유적이 요국의 도읍이라는 추정을 전제로 하는 것이어서 확실하게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연구는 단주와 순을 둘러싼 지배계층의 대립이 있었을 것이라는 최동희의 가설에 근거를 제시해주었다는 점에서 일정한 의의가 있다.
▲ 『사통』(710년)은 당나라의 학자 유지기(劉知幾)가 저술한 역사 비평서이다.
최근 이광주도 이들과 유사한 관점에서 단주의 원을 다루었다.12 그는 「해원상생의 시발점」(2013)이라는 글에서 순으로부터 유배를 당한 단주가 삼묘족(三苗族)과 연합하여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자결했다는 기록이 있음13을 들어 단주와 순 사이에는 갈등 관계가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단주는 반만 년 동안 불초하다는 평을 들어왔으나 실제 그는 총명한 인물이었고 다른 이민족들과 화합하는 대동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뜻을 이루지 못했던 인물이라는 기록이 다른 증산계 경전에 있음14을 언급하고 있다.
중국의 저명한 도교학자인 좐스촹[詹石窗]도 「대순사상의 인문정신과 인류평안의 이념」(2013)에서 단주의 원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15 그 내용은 앞서 기술한 『죽서기년』을 근거로 한 것인데, 순이 요와 단주 사이를 갈라놓았으며 단주를 유배 보냈기에 단주로 하여금 원을 품게 하였다는 것으로 요약된다.16
Ⅲ 상제님의 단주 해원공사로 보는 단주 원의 실체
현재까지 진행된 논의들은 단주가 왕이 되고자 하였으나 당시 지배계층과 이견(異見)이 있어 뜻을 이루지 못했고, 그게 그의 원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그 이견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고증은 부족한 실정이다.
그렇다면 이제 다루어야 할 문제의 핵심은 단주가 제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벗어나 그가 요순을 포함하여 당시 지배층과 어떻게 대립하였는지, 또 권좌에 오를 수 있는 무임승차권을 애초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던 그가 왜 굳이 왕이 되고자 했는지를 밝히는 데에 있다.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단주의 원을 말씀하신 분이 상제님이시라는 사실이다. 그 이전에는 단주가 원을 가졌다고 이야기한 분이 아무도 없다! 또 단주의 원을 풀어주기 위한 공사를 보신 분 역시 상제님이셨다! 따라서 필자는 단주가 품었던 원의 실체를 파악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상제님의 단주 해원공사를 살피는 것이라고 본다. 만약 단주가 왕이 되지 못했으므로 원을 품게 되었다면 상제님께서는 단주를 왕이 되도록 만드심으로써 그의 원을 풀어주셨을 것이고, 불초하다는 오명을 들었으므로 원을 품었다면 그 오명을 벗기고 빛나는 이름을 가지게 해주심으로써 그의 원을 풀어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A) 또 상제께서 장근으로 하여금 식혜 한 동이를 빚게 하고 이날 밤 초경에 식혜를 큰 그릇에 담아서 인경 밑에 놓으신 후에 “바둑의 시조 단주(丹朱)의 해원도수를 회문산(回文山) 오선위기혈(五仙圍碁穴)에 붙여 조선 국운을 돌리려 함이라. 다섯 신선 중 한 신선은 주인으로 수수방관할 뿐이오, 네 신선은 판을 놓고 서로 패를 지어 따 먹으려 하므로 날짜가 늦어서 승부가 결정되지 못하여 지금 최수운을 청하여서 증인으로 세우고 승부를 결정코자 함이니 이 식혜는 수운을 대접하는 것이라.” 말씀하시고 …17
(B) 상제께서 각 처에서 정기를 뽑는 공사를 행하셨도다. 강산 정기를 뽑아 합치시려고 부모산(父母山)의 정기부터 공사를 보셨도다. “부모산은 전주 모악산(母岳山)과 순창(淳昌) 회문산(回文山)이니라. 회문산에 二十四혈이 있고 그 중에 오선위기형(五仙圍碁形)이 있고 기변(碁變)은 당요(唐堯)가 창작하여 단주를 가르친 것이므로 단주의 해원은 오선위기로부터 대운이 열려 돌아날지니라. 다음에 네 명당(明堂)의 정기를 종합하여야 하니라. ….”18
▲ 순창 북쪽에 자리한 회문산(回文山)에는 오선위기혈이 있다. 순창 회문산은 전주 모악산(母岳山)과 함께 부모산(父母山)으로 불린다.(Google Earth 캡처)
▲ 여주본부도장 숭도문에 그려져 있는 오선위기혈의 모습
그런데 위에서 보듯이 상제님의 단주 해원공사는 그러한 내용이 아니었다. 고로 단주의 원은 오명을 들었다거나 제위에 오르지 못했다거나 하는 차원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상제님께서 설계하신 단주 해원 도수는 오선위기혈에 붙여졌고, 그 혈의 발휘에 따라 조선 국운이 돌려지고 대운이 열리면 단주의 해원도 이루어지게 되어있다. 이 공사는 다소 뜬금없게 느껴질 수 있다. 도대체 단주의 해원 도수와 오선위기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요가 바둑 두는 법을 만들어 단주에게 전하였고 그로써 단주가 바둑의 시조가 되었다는 사실은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었기에, 상제님께서는 그 점을 활용하시어 단주의 해원 도수를 다섯 신선이 바둑을 두고 있다는 오선위기혈에 붙이셨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단주와 오선위기혈 사이에 있는 ‘바둑’이라는 공통분모가 단주의 해원이 성사될 수 있는 하나의 연결고리임은 분명하지만, 그 공통분모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단주의 해원이 이룩될 수 있는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즉, 단주의 원이 풀리려면 오선위기혈의 기운이 발휘되어 조선의 국운이 돌려지고 대운이 돌아나야 한다는 사실은, 단주 원이 오선위기혈의 상징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며 오선위기혈 공사와 맞물려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뜻이다.
상제님께서 단주 해원 도수를 보신 시기는 1907년 무렵이었다. 그 근거는 위 인용문 (A)에 등장하는 박장근이라는 종도에게 있다. 상제님께서 1907년 여름에 차경석과 박공우를 잇달아 종도로 삼으시고 정읍에 가시어 여러 공사를 보시던 시절, 순창 농암에 살던 박장근도 상제님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그 해 말 고부화액을 당하고는 1908년부터 더 이상 상제님을 따르지 않았다.19 이런 연유로 해서 단주 해원 도수 즉 오선위기혈 공사는 1907년 하반기 즈음에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1907년은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되고, 정미조약의 체결로 군대도 해산 당했으며, 사법권과 경찰권마저 일제에게 빼앗긴 해였다.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조선은 산소마스크에 의지한 채 힘겹게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는데, 바로 그 해에 상제님께서는 오선위기혈 공사로써 조선의 국운을 돌린다고 하셨다. ‘돌린다’고 함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전환함, 향상·확장·성장을 추구함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상제님의 이 말씀은 약소국에 불과했던 조선이 장차 국권을 회복하고 더 나아가 큰 발전을 이루게 됨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20
다음의 상제님 말씀은 이 사실을 입증해준다.
“현하 대세가 오선위기(五仙圍碁)와 같으니 두 신선이 판을 대하고 있느니라. 두 신선은 각기 훈수하는데 한 신선은 주인이라 어느 편을 훈수할 수 없어 수수방관하고 다만 대접할 일만 맡았나니 연사(宴事)에만 큰 흠이 없이 대접만 빠지지 아니하면 주인의 책임은 다한 것이로다. 바둑이 끝나면 판과 바둑돌은 주인에게 돌려지리니 옛날 한고조(漢高祖)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으되 우리나라는 좌상(座上)에서 득천하(得天下)하리라.” … “우리나라를 상등국으로 만들기 위해 서양 신명을 불러와야 할지니…”21
이처럼 상제님께서는 오선위기의 비유로써 우리나라가 천하를 얻게 된다고 하셨다. 또 장차 우리나라가 상등국이 된다고 하셨다. 유의할 점은 여기에서 상등국(上等國)을 강대국(强大國)과는 다른 의미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흔히 강대국은 열강(列强)이라 하여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의 제국주의 시대와 그 이후의 동서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패권주의 개념을 내포하는 용어로 인식되어왔다. 상제님께서는 트집을 잡고 싸우려는 사람에게 마음을 누그리고 지는 사람이 ‘상등’ 사람이라고 하셨고, 또 도통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 능력[用事] 차이에 따라 상등·중등·하등으로 나뉘게 된다고 하셨다.22 이 말씀들을 감안하면 ‘상등’이라는 용어는 상대를 힘으로 찍어 누르는 패권주의와는 무관하다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상등’의 나라[上等國] 역시 패권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결국 상제님께서 “재조(才操=재주)가 월등한 나라가 상등국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에서 보듯이,23 상등국이란 무력을 앞세우거나 군림하는 강대국이 아니라 재주, 즉 문화와 문명이 뛰어난 나라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우리나라를 그러한 상등국으로 만드시는 상제님의 공사가 오선위기혈 공사이다. 그리고 그 일은 단주의 원이 풀리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주는 우리나라와 같은 약소국을 상등국이 되도록 만들지 못하였던 것에 대한 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야 된다. 다시 말하자면, 상제님께서 행하셨던 단주 해원공사를 근거로 했을 때, 단주의 해원은 동방의 작은 약소국의 국운이 상승하고 상등국이 되는 데 달려있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단주 원의 실체는 약소국이 주변 강대국들에게 희생당하는 것을 막고 보존하며, 더 나아가 약소국을 상등국으로 만들어주려다 실패한 데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Ⅳ 요순의 문명화와 주변 부족들과의 갈등
위에서 이야기한 단주 원의 실체를 받아들인다면, 적어도 단주는 약소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인물이었어야 한다. 실제로 단주에 대한 전승은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제 이에 대한 탐구에 들어가 보자.
요와 단주, 그리고 순 시절의 역사를 전해주는 기록은 여럿인데, 그 중 가장 오래되고 권위가 있는 것으로는 『상서(尙書)』(=『書經』)와 『사기』를 꼽을 수 있다.24 『사기』의 기록은 『상서』의 문장을 그대로 빌려온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실 『상서』가 시기적으로나 권위적으로나 가장 중요한 문헌이다.
『상서』에 따르면 요가 통치하던 시절의 요국은 해와 달, 별의 운행을 관찰하여 역법(曆法)을 펴낼 정도로 높은 문화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25 이런 문화 대국이었던 요국은 점차 그 세력을 확장하여 주변 부락들을 규합해 나갔다. 요국은 그 부족들을 하나의 일관된 통치 체제 속에 묶어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요와 그 뒤를 이을 통치자에게 주어진 숙제가 바로 그것이었는데, 문제는 그 통치 체제 속에서 요국과 주변 부족들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시킬지 하는 것이었다.
『상서』는 요의 후계자인 순이 국가 통치 체제를 확립할 때 법률 특히 형벌을 정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고 말한다.
법으로는 일정한 형벌을 정했으며, 다섯 형벌은 유배형으로 너그럽게 만들었다. 관에서는 채찍으로 형벌을 내리게 했으며, 종아리를 때림으로써 교화하도록 하였고, 벌금으로 체형을 대신하도록 하는 법도 정했다. 과실과 재난으로 지은 죄는 용서하였으나 지은 죄를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다면 사형에 처하도록 하였다.26
순은 덕이 높은 인물로 알려져 있음에도 형벌로써 국가 통치 기반을 삼았다는 것은 뜻밖의 사실이다. 게다가 그 형벌도 매질을 한다거나 사형까지 시키는 것이어서 결코 가벼운 게 아니었다. 『상서』는 유배형을 너그러운 형벌이라고 적고 있지만 그것도 시행 정도에 따라서 얼마든지 가혹한 것이 될 수 있었다. 다음의 『상서』기록을 보자.
공공(共公)을 유주(幽州: 지금의 하북성 동북쪽 일대)로 귀향 보내고, 환도(驩兜)를 숭산(崇山)에 유배 보내고, 삼묘(三苗)를 삼위(三危: 지금의 감숙성 돈황현 남쪽)로 내쫓고, 곤(鯀)을 우산(羽山)에서 죽였다. 이와 같이 네 가지 형벌을 가하자 천하 만민이 모두 따르게 되었다.27
▲ 『상서(尙書)』는 유교의 기본 경전인 삼경(三經) 가운데 하나로, 중국 전통 산문의 근원이라고 한다. 원래 명칭은 『서(書)』였으며, 한나라 때는 『상서』로, 송나라 때는 『서경』으로 불렸다.
순이 공공과 환도에게 내린 유배형이 사형과 동일한 지평에서 기술되고 있다는 점이나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따르게 되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유배형이 상당한 수준의 형벌이었음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순은 유순한 덕만 가진 군주는 아닌 듯하다. 특히 그가 쫓아낸 공공과 환도는 요가 후계자를 찾을 때 순보다 먼저 천거된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역사기록은 이들을 흉흉한 악인이라고 하지만, 명망 높은 사람이 천거되던 시절에 이들이 임금의 후보자로 거론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을 무조건 악당으로 몰아붙일 수는 없다. 사실 그들은 순이 통치하던 시대에 임금의 자리를 넘볼 수 있을 정도로 존재감과 영향력이 상당했던 인물들이라고 해야 옳다. 순은 자신의 지배 구도를 만들면서 정치적으로 위협이 될 수 있는 이들을 제거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28 그렇다면 순은 덕이 높기도 하지만 실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유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순은 규합했던 주변 부족들의 영역을 12주(州)로 편성함으로써 자신의 통치 영역으로 제도화시켰다. 그리고 그 부족들에게 자신들의 문화를 그대로 주입했다. 이를테면 제각각이었던 각 부족들의 음률(고대에는 음률이 중요한 통치 수단이었다)과 도량형 단위, 달력들을 버리고 중앙 통치국에서 만들어 준 표준에 맞추도록 하였다. 아울러 그 부족장들이 자신을 접견할 때 지켜야 할 예절들까지 정해주었다. 순은 자신이 제시한 이런 질서를 부족들이 잘 따를 경우 수레와 의복으로써 포상하였다.
(순은) 동쪽의 제후들을 접견하여 철과 달을 맞추고 날짜를 바로잡았다. 또 음률과 도량형을 통일하고, 오례(五禮: 吉禮, 凶禮, 賓禮, 軍禮, 嘉禮)·오옥(五玉: 대신들이 조정에서 국사를 의논할 때 드는 다섯 가지의 홀)·삼백(三帛: 관리가 조정에서 드는 세 가지 비단)·이생(二生: 卿大夫들이 드는 어린 양과 기러기)·일사(一死: 兵刑을 관장하는 관리가 드는 꿩)의 지(贄: 처음 만났을 때 인사로 나누는 예물)를 정리하였다.29
(순은) 5년마다 한 번씩 순행을 하고 제후들은 4년마다 한 번씩 내조토록 했다. 그때 제후들에게 시정 방침을 건의하도록 하였고, 실제로 그대로 행하고 있는지를 따져서 공적이 있으면 그들에게 수레와 의복을 내렸다. 새로 12주를 설치하고 12산을 정하여 각 주를 지키게 했으며, 개천에 물이 잘 통하도록 하였다.30
이처럼 순은 중앙 통치국과 주변 부족들을 철저한 주종(主從) 관계의 제국(帝國)으로 묶었다. 그리고 제국의 영역을 더욱 확장시켜나가고자 했다. 순과 그 계승자인 우가 한 말은 이런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순이) 12주를 다스리는 관리들에게 말했다. “농사지을 때를 놓치지 않도록 하라. 멀리 변방에 있는 사람을 어루만져주고, 가까이 있는 사람은 도와주며, 덕을 두텁게 하고 간사한 자를 막아라. 그러면 주변의 오랑캐[蠻夷]도 복종할 것이다.”31
우가 말했다. “맞습니다. 임금이시여. 하늘 아래에서 바다 끝까지 이르도록 창생을 빛내시면 만방의 백성과 어진 이들이 모두 임금의 신하가 되려고 할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이들을 수시로 임용하시어 널리 말을 받아들이소서. 그들의 공을 분명히 밝혀 수레와 의복을 상으로 주어 중대한 임무를 맡기신다면, 그 누가 사양하겠으며 그 누가 감히 삼가 오지 않겠습니까?”32
이들의 말을 요약하면, 발달된 선진 문화를 전수하여 문명화시켜주고 덕으로 처사하면 주변 오랑캐들을 감화시켜 복속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속적으로 그들의 세력권을 넓혀나가겠다는 의도를 보여준다.
순과 우는 자신들의 선진 문화를 전수해주고 덕을 편다면 신하가 되기를 자청하지 않을 부족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순이 자신의 통치 영역으로 복속시킨 부족들에게 이식시킨 문화는 분명 뛰어난 것이었다. 그러한 선진 문화를 받아들인 각 부족들은 보다 문명화되고 향상된 삶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부족이 생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게 문제가 된다.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문명의 혜택을 전해주어 번영을 도모케 해주는 것이 정의였겠지만 상대의 입장에서는 아닐 수도 있었다. 사실 주변 부족들은 순의 말을 잘 듣는다면 포상을 받았지만,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 지도자들이 쫓겨나야 했다.33 또 각 부족들은 자신들의 지역 토질과 물산을 조사당하고 그 매겨진 등급에 따라 세금까지 바쳐야 했다.34 그렇다면 선진 문화의 수입으로 일정한 발전과 번영을 약속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고유한 전통과 문화를 말살 당하며 중앙의 일방적인 통치를 받아들여야 했던, 그리고 그러한 질서를 따르지 않는다면 억압을 당해야 했던 입장이었던 주변 부족들은 모두가 순의 통치에 찬동하고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와 그 후계자인 순이 통치하던 시절, 주변 부족들을 복속하고 문명화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모든 부족들이 저항하지 않아야 하고, 중앙 통치국이 베푸는 덕에 기뻐하며 스스로 찾아와 복종해야 마땅하다는 『상서』의 기록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 의심은 다음 『한비자』의 기록에서 확정된다.
옛날 요가 천하를 다스릴 때는 흙으로 만든 그릇에 밥을 담아 먹었으며 흙으로 만든 병에 물을 담아 마셨다고 합니다. … 그러니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가 천하를 선양하여 순에게 전하자, 순은 산의 나무를 베고 옻칠을 하여 식기로 썼습니다. 그러자 제후들은 사치가 지나치다고 여겼고 열세 나라가 순에게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순이 천하를 선양해 우에게 전하자 우는 옻칠을 한 그릇의 안쪽에 그림을 그렸으며 무늬를 넣지 않은 흰 비단을 침구로 썼습니다. … 이와 같이 사치가 심해지자 서른세 나라가 복종하지 않았습니다.35
기원전 700년경에 서융(西戎)에서 사신으로 중원에 온 여유(由余)가 춘추오패 중 한 명이었던 진(秦)나라 목공(穆公)에게 한 이 말은 사치스러운 중원의 문화에 대해 비판한 것이었고, 그 충고에 목공은 여유를 현자(賢者)로 대접했다고 한다. 서융, 즉 서쪽 오랑캐로 멸시받던 신분이었던 여유의 발언이 중원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순이 정권을 잡은 이후부터 주변의 모든 부족들이 당연하게 순을 따라야 마땅하며 실제 그러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된다. 더구나 여유의 말대로라면 순의 통치 방식을 그대로 이어받은 우의 시대가 되면 따르지 않는 주변 부족들이 더 늘어나고 있다.
Ⅴ 삼묘족의 항거와 단주
요와 순, 그리고 우의 통치 시대, 문명화에 기초한 그들의 세력 확장에 극렬하게 저항했던 부족으로는 치우의 후예라고 하는 삼묘족(三苗族)을 꼽을 수 있다. 삼묘족은 오늘날 묘족의 선조이다. 현재 중국에서 묘족은 55개 소수민족들 가운데 하나로 귀주성과 호남성 남부, 운남성 등 주로 중국 남방의 산간지대에 거주하면서 900만 정도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지금도 여전히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와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는데, 특히 중국 한족(漢族)의 지배를 거부하고 대립한 오랜 역사를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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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호남성 서부에 위치한 190㎞ 길이의 남방장성(南方長城)이다. 중국학자들은 이 장성을 민족 융합의 증거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지만, 사실 명나라 말기에 축조된 이 장성은 당시에 중앙집권 세력의 손길을 거부하면서 거의 10년에 한 번씩은 거병했던 묘족을 막기 위해 세울 수밖에 없었던 건축물이었다. 명나라는 남방장성 안쪽에 거주하면서 자신들의 말을 잘 듣는 묘족을 성숙하다는 뜻의 숙묘(熟苗)로, 성 바깥에 살면서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 묘족을 성숙하지 못하고 날 것 그대로라는 뜻의 생묘(生苗)로 불렀다.37 이러한 묘족과 명나라의 갈등은 1992년에 개봉한 영화 ‘동방불패’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묘족의 강인한 민족성은 그들의 선조인 삼묘족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순은 그런 삼묘족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결국 그는 자신의 통치 체제에 들어오지 않고 반항하는 삼묘족을 정벌하기로 결정하는데, 『상서』는 이 사실을 이렇게 적고 있다.
▲ 묘족의 전통 의상
▲ 묘족을 막기 위해 명나라가1615년∼1622년 사이에 건축한 남방장성
순이 말했다. “아, 우여! 오로지 묘족만이 복종하지 않으니 그대가 가서 벌하시오.” 우는 곧 제후들과 회합하고 군사들 앞에서 연설하였다. “여러분, 나의 말을 잘 들으시오. 어리석은 묘족이 사리에 어둡고 불초하며, 공경할 줄 몰라 남을 경멸하고, 모반하면서 스스로 잘난 체 하니 도에 벗어나고 덕을 손상시키고 있소. 군자는 초야에 묻혀있고 소인이 벼슬자리에 있으며, 백성은 그들의 땅을 버리고 보호하지 않으니 하늘에서 재앙을 내리게 되었소. 드디어 내가 그대들과 함께 (순) 임금의 명을 받들어 그 죄를 벌하고자 하니, 그대들은 마음과 힘을 하나로 뭉쳐 공을 세우도록 하시오.” 30일 동안 묘족들이 항복하지 않고 싸우니, 익이 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로지 덕만이 하늘을 움직일 수 있고, 아무리 먼 곳이라 하여도 덕이 미치지 않음이 없습니다. 자만하면 손해를 자초하고 겸손하면 이익을 얻는 것이 하늘의 길입니다. ….” 우는 훌륭한 말에 절하며 “그렇소.”하고 말하고는 군사를 거느리고 후퇴했다. 순이 곧 문치(文治)와 덕을 크게 펴니 … 묘족은 불과 70일 만에 감화되었다.38
이 기록을 살펴보면, 순은 삼묘족이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늘로부터 징벌을 받는 게 마땅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우에게 군대를 동원하여 삼묘족을 쳐부수라고 명령한다. 우는 삼묘족이 어리석고 공경할 줄도 모르며, 현인들을 내쫓고 소인배들만 등용하여 백성들을 버리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위풍당당하게 출정했다. 만약 삼묘족이 우의 말대로 ‘형편없는’ 지경이었다면 단합되지 못하고 이미 스스로 지리멸렬한 상태였을 터이니 훈련이 잘 된 대병력의 우의 군대를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는 고작 한 부족에 불과한 삼묘족과 30일을 싸웠음에도 그들을 이기지 못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익(益)이라는 신하는 무력이 아니라 덕으로 처사해야 한다고 충고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우는 군대를 물린다. 순은 우의 건의를 받아들여 덕을 크게 폈고 이에 감동한 삼묘족은 70일 만에 스스로 항복하였다는 게 대체적인 줄거리이다.
▲ 단주의 봉지인 석천현과 장자현, 그리고 순이 죽은 장소인 구의산과 순의 두 왕비 묘의 위치(바이두 지도)
원래 순과 우는 언제나 덕을 펴는 어진 임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상서』는 익이라는 신하의 입을 빌려 순과 우가 삼묘족에 대해서는 덕 대신 무력을 앞세웠음을 지적하고 있다. 쉽사리 전쟁에서 이기기 힘들었던 순과 우는 그 의견을 받아들여 무력을 거두고 비로소 덕을 펴는 정책으로 선회했다.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던, 혹은 의도적으로 묻혔던 순과 우의 또 다른 모습이 있었다는 뜻이다.
종족의 운명을 가늠할 처절한 전쟁이 끝난 지 불과 70일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삼묘족이 침략 당사자인 순이 덕을 펴는 모습에 감동하여 귀순해 왔다는 『상서』의 기록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실제 『상서』의 다른 기록에는 삼묘족이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는 기사가 나온다.39 또 『상서』에는 우가 삼묘족의 우두머리를 내쫓았다고 순에게 보고한 기록40도 있는 것으로 보아 삼묘족과 순의 관계는 끝까지 불편했던 것으로 보인다.
단주는 바로 이 삼묘족과 일정한 관련이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상반된 설이 있다.
첫째는 순이 단주에게 단수(丹水: 하남성 석천현)41를 봉지(封地)로 주었고, 삼묘족이 중앙의 통치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순은 단주에게 토벌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단주는 삼묘족을 제압하였으나 시기질투를 받아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고, 이에 스스로 순에게 군사권을 반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당시 역병이 돌던 장자(長子) 지역으로 가서 질병을 막고 수리(水利)시설도 설치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고 한다.42 장자 지역은 지금의 산서성 장치시(長治市) 장자현(長子县)이고, ‘장치(長治)’와 ‘장자(長子)’라는 이름은 단주가 요의 맏아들이라는 점 때문에 붙은 명칭이며, 여기에 속한 고을 단주진(丹朱镇)은 단주의 또 다른 봉지라고 알려져 있다.43
둘째는 순이 요와 단주 사이를 이간질하여 단주를 단수로 유배 보내도록 만들었으며, 요를 감금하고 왕위를 찬탈하기까지 하자 단주가 삼묘족을 동원하여 군사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두 군대는 단수 유역[丹浦]에서 격돌하였는데, 단주에게는 조력자인 거인족 수령이 실수로 늪에 빠져 죽는 큰 전력 손실이 있었던 반면에, 순은 자신과 같은 동이 출신이자44 활쏘기의 달인들인 후예(后羿)부족의 도움을 받아 전력 증강에 성공함으로써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고 한다. 또는 요가 불초한 자신의 아들 단주를 단수로 유배 보내었고, 이에 단주가 삼묘족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요는 직접 군대를 동원하여 단주와 삼묘족을 단수 유역에서 제압하였다고도 한다. 어쨌든 전쟁에 참패한 단주는 스스로 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는 게 이 설의 결말이다.45
이처럼 단주가 삼묘족을 토벌했다는 설과 그 반대로 삼묘족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설이 서로 대치되고 있다. 두 가지의 설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심지어 단수가 단주의 봉지였는지 유배지였는지에 대한 논란이나,46 순이 요에게 선양을 받은 것인지 찬탈을 한 것인지 조차 아직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단주 전승에 대한 이런 혼란에도 불구하고 삼묘족과 힘을 합쳤다는 설, 또는 삼묘족과의 전쟁 후에 자신이 원래 받았던 봉지인 하남성 석천현을 떠나 북동쪽으로 거의 400㎞나 멀리 떨어진 장자 지역으로 ‘굳이’ 가서 역병에 걸린 그곳 백성들을 돌보고 그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는 설은, 단주가 통치자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치하는 집단보다는 통치 받는 집단들과 가까웠다는 사실이 오랜 세월 동안 알려져 왔음을 보여준다.47 한 마디로 말해서 단주는 약자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Ⅵ 단주 원의 재구성: 시대 한계와 정치노선의 차이
단주가 약자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였다면, 요순시대 중원 제국 확장기에 일어난 주변 부족들과의 분쟁에서 힘없는 약소 부족들의 입장을 반영하려고 노력했을 것임은 충분히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상제님의 단주 해원공사로부터 파악한 단주 원의 실체를, 단주를 둘러 싼 시대 상황 속에서 ‘재구성’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요는 확장되는 자신의 나라와 주변 부족들을 하나로 묶을 체제를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그것은 앞에서 보았듯이 주종의 관계였다. 요가 무려 28년이나 섭정하여 가르친 순이 그런 정책으로 일관했다는 것에서 그런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주종의 관계로써 제국의 기초를 세우는 것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상제님께서는 “당요(唐堯)가 일월의 법을 알아내어 백성에게 가르쳤으므로 하늘의 은혜와 땅의 이치가 비로소 인류에게 주어졌나니라.”48, “요순의 도가 다시 나타나리라”49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하늘[先天]은 무지한 인간을 계몽하고 문명화하기 위해서 성인(聖人)들을 세상에 내려 보내는데, 요와 순 역시 그러한 분들이었다는 뜻이다. 그런 요였기에, 그가 주변 부족들에게 선진 문화를 이식시키고자 한 뜻은 주변 부족들을 문명화시켜 그들의 발전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려는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립된 채 자급자족의 생활에 안주하고 있던 문맹의 부족들에게 선진 문화의 혜택은 그들의 삶 향상에 질적으로 크게 기여했을 것임을, 더 나아가 인간으로서의 의미 있는 발전을 이룰 기회를 제공했을 것임은 당연하다.
더구나 요순시대는 범람하는 황하의 홍수 문제로 모두가 머리를 싸맬 때였다. 요순은 우라는 걸출한 인물을 등용함으로써 그 문제를 풀었는데, 모든 것을 인력으로 해야 했던 그 시절에 홍수를 막는 치수사업은 일개 부족이 감당할 수 없는 대규모의 토목공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주변 부족들의 힘으로는 절대 막을 수 없던 자연재해를 중앙 통치국이 해결해주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게다가 제국의 영역에 발을 들임으로써 더 먼 이민족들의 침략으로부터도 나름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니,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주변 부족들에게 번영을 약속하는 일이었다.
정리하자면, 문명의 전파와 수혜 즉 스승과 제자라는 측면에서, 또 홍수나 타 부족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라는 측면에서, 요순이 보기에 통치국과 주변 부족이 주종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은 타당한 것이었다.
다만 주종 관계가 지나치게 딱딱해지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요순은 이에 대한 대비책도 나름 세워두었다. 상제님께서 “서전 서문을 많이 읽으면 도에 통하고….”50라고 하셨던, 바로 그 『서전』 서문의 핵심은 요순우 삼대에 이어진 ‘인심유위(人心惟危: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기만 하고) 도심유미(道心惟微: 도의 마음은 극히 미약하니) 유정유일(惟精惟一: 정신을 오직 하나로 모아) 윤집궐중(允執厥中: 그 中正을 진실로 잡아야 한다)’이라는 16글자 심법(心法)이었다.51 즉 중정(中正)을 지키라는 16글자의 심법에 근본을 둔 통치라면, 비록 주종 관계라고 하더라도 반발이나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게 요순의 판단이었다.
요는 이런 정치노선을 실현시킬 방안으로, 형벌과 적절한 보상, 그리고 최후의 수단으로는 군대를 동원하는 무력을 구상했다. 그리고 자신의 후계자로 순을 지목하고 28년의 섭정으로써 자신의 구상을 꾸준히 실천에 옮겼다. 성인이었던 요가 힘에 바탕을 두는 이런 방식을 선택한 것은 문맹의 주변 부족들을 ‘빠르게’ 흡수하여 문명화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다. 속도에 중점을 두는 이런 방안은 광범위하고도 효과적인 문명 전파 방식이었지만 일정한 반발도 각오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통치 시대에 제국의 영역이 확장될수록 주변 부족들과의 마찰이 잦아졌던 것은, 주변 부족들의 입장에서 문명화의 혜택이 좋기는 하지만 주종의 관계와 무력을 앞세운 그들의 정치노선이 결코 달가운 것은 아니었음을 의미했다.
요의 정치노선은 대대로 계승되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함에 따라 16글자 심법에 바탕한 성인 정치의 도는 빛을 잃어갔고, 결국 요의 정치노선은 중앙과 주변을 분리시키는 이분법 정책으로 경도되었다. 중앙 통치국이 오만에 빠지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고, 중앙의 천자 혹은 중국을 숭상하되 주변 오랑캐는 천시하고 물리치라는 존왕양이(尊王攘夷)존화양이(尊華攘夷) 관념이 대두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관념이 대의명분이니 춘추대의(春秋大義)니 하는 것으로 포장유포되기까지 하자, 중국의 천자는 하늘로부터 인도(人道)를 추출해 낸 성인(聖人)이기에 그와 중국을 따르는 것이 천명을 받드는 일이며,52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가 감히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거나 천문을 관측한다거나 하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고,53 오로지 조공을 바치며 간섭을 받고 복종을 해야 마땅하다는 사고방식도 뿌리박히도록 만들었다.
단주는 요와는 정치노선이 달랐다. 요의 아들이었던 덕에 중앙 통치국의 입장을 충분히 알고 있었던 단주는 약자의 처지 또한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는 평소 신념을 가졌으므로 균형 잡힌 정치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단주는 중앙의 선진 문화로써 주변 부족들에게 문명의 혜택을 안겨다주어야 한다는 데에 대해서는 수긍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앙과 주변 부족을 무력에 근거한 주종의 관계에 두는 것에 반대하고, 그 대신 중앙과 주변을 하나로 아우르는 방안을 구상했다. 단주가 그러한 정치노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힘없는 부족들 위에 군림하려는 중앙 통치국을 통제할 수 있는 군주가 되어야만 했다. 『시자(尸子)』가 말한 대로, 높고 높아야 밝게 비출 수가 있고, 높은 지위에 있어야만 온 세상에 이로움을 줄 수 있는 법이며, 천하의 백성을 모두 사랑할 수 있는 자리가 곧 천자인 까닭이다.54
실제로 그는 군주세습제가 없었던 시절에 신하들에 의해 왕으로 천거되었다. 그 사실은 단주가 유능하고 덕망이 높았으며 자신을 따르는 일정한 세력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주변 부족들에게 문명의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되 그 관계는 주종이 아니어야 한다는 단주의 구상은 다분히 이상적인 것으로 들렸겠지만, 뛰어난 능력과 균형 있는 정치 감각을 갖춘 그였기에 그가 군주가 되었다면 중앙 통치국과 주변 부족들의 관계를 원만하게 만들어나갈 가능성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요는 단주의 구상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정치노선을 실현할 수 있는 인물로 순을 선택하고 단주에게는 바둑판을 던져주기에 이른다. 『채지가』는 이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강구연월 격양가는 당요천하 송덕할 때 만승천자 어데 두고 바둑판이 웬일인고 자미원에 몸을 붙여 후천운을 기다리니 … 구천에 호소하니 해원문이 열렸구나.55
요지자는 단주로서 바둑판을 받을 적에 후천운수 열릴 때에 해원시대 기다리라 정녕 분부 이러하니 그 이치를 뉘 알소냐. 오만년지 운수로다 그 아니 장할시구.56
이처럼 단주에게 먼 훗날을 기다리라고 분부했던 요라면, 요는 단주의 구상이 상생대도가 펼쳐지는 후천이 열릴 때라야 실현될 수 있는 것이며 당시의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상제님께서는 후천이 되면 천하가 한집안이 되며 위무와 형벌을 쓰지 않고 창생을 다스린다고 하셨다.57 후천은 중앙과 주변의 구별이 없이 모두가 하나로 되며, 위무(威武: 위세와 무력)도 형벌도 쓰지 않는 세상이라는 것이니, 실로 단주의 꿈은 상제님의 개벽공사에 의해 새로운 세상이 열릴 때라야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요와 순은 주변 부족들을 문명화하여 발전시키라는 천명을 받은 성인(聖人)들이었으나, 후천이 아닌 선천의 현실에서 그것을 빠르고 효과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부작용이 뒤따른다고 하더라도 중앙 통치국과 주변 부족의 관계를 주종으로 두면서 힘을 사용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결코 피를 앞세우는 정복자들이 아니었다. 단지 시대 상황, 즉 아직 문명화되지 못한 부족들의 의식 수준이 미처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예측했고, 지극히 현실적인 측면에서 문명화를 빠르게 시도하려고 했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선천에서 벌어지는 역사의 한계였을 따름이었다.
이로써 단주는 주변 부족들을 문명화시켜 나가면서 중앙 통치국과 주변 부족들의 관계를 주종의 관계를 넘어 선 그 이상의 조화로운 관계로 구축해나갈 기회를 잃고 말았다.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선구자의 과감한 시도는 실천에 옮겨지지 못했는데, 그 원인 제공자는 다름 아닌 자신의 부친 요였지만 단주의 입장으로서는 당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있던 부친을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단주의 원이 발생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까지 기술한 지평에서 상제님의 단주 해원공사를 다시 바라본다면, 약소국을 상등국으로 만들되, 그 상등국은 무력에 기반한 패권주의 강대국이 아니라 문화와 문명이 발달한 국가라야 하고, 그것이 실현되었을 때 비로소 단주의 원이 풀려나갈 것이라는 상제님의 공사는 이해가 가능해진다.
부친의 반대로 자신의 꿈을 펼쳐보지 못한 채 묵묵히 바둑만 두고 있었던 단주를 역사는 불초한 인물이라고 기록했다. 상제님께서도 ‘단주가 불초하다 하여’라고 하셨지만, 이 말씀은 상제님께서 단주가 불초하다고 평가하신 게 아니다. ‘단주가 불초하였으므로’와 ‘단주가 불초하다고 하여’는 분명히 다른 표현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상제님께서는 단주가 불초하다는 평을 들어왔다는 세간의 사실을 말씀하신 것뿐이다.
상제님께서는 동곡약방을 설치하실 때 ‘단주수명(丹朱受命)’이라 하셨는데,58 단주수명이란 말 그대로 단주가 명령을 받든다는 뜻이다. 어떤 명령인지는 모르나 동곡약방의 의미를 감안하면59 적어도 그것이 후천개벽과 관련된 중요한 일이었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만약 단주가 불초하였다면, 상제님께서 그런 단주에게 막중한 사명을 맡기셨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단주가 불초하였다는 세간의 기록은 두 가지 방향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하나는 원래 기록이라는 게 승자의 입장에 서는 것이므로 왕이 된 순은 성인으로, 왕이 되지 못한 단주는 어리석은 인물로 구분해 놓은 것이라는 점이다. 단주의 입장에서는 이런 폄하된 기록이 고약한 것이겠지만, 이 정도의 비방에 인류 역사를 뒤흔들 원을 만들어 낼 정도로 단주의 그릇이 작았다고는 보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불초라는 말이 어리석고 우둔하다는 뜻이지만 그 의미는 자신의 아비와 ‘닮지[肖] 않았다[不]’는 데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요가 한 불초라는 말에는 어리석다는 뜻 외에 요와 단주의 정치노선이 서로 닮지 않고 달랐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제국이 확장되던 시절에 주변 부족들을 문명화하되 그들과의 관계를 주종으로 두거나 힘으로 눌러서는 안 된다는 단주의 구상은 그 부친인 요가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단주는 주변 부족들의 억울한 사정을 조금이라도 줄여주기 위해서는 군주가 되어야 했고 그것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것을 막은 이는 자신의 부친인 요였고, 그로써 단주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것이 단주가 원을 지니게 된 사건의 실체였다고 본다. 약자의 입장에서 그들을 문명화하고 그들의 권익을 대변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기에 단주가 품게 되었던 원, 그 가상한 뜻은 상제님께서 해원공사의 첫머리로 삼아 풀어주시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Ⅶ 단주의 원에서 배우는 교훈
상제님께서는 후천의 선경을 세워 세계의 민생을 건진다고 하시면서 삼계공사를 시작하실 때, “명부의 착란에 따라 온 세상이 착란하였으니 명부공사가 종결되면 온 세상 일이 해결되느니라.”고 하시며 명부공사부터 착수하셨다. 그리고 그 공사에서 조선의 명부를 담당하는 인물로 전봉준을 선정하셨다.60 상제님께서는 그 전봉준에 대해 “우리의 일은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이니라. 남이 잘 되고 남은 것만 차지하여도 되나니 전명숙(전봉준)이 거사할 때에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賤人)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을 두었으므로 죽어서 잘 되어 조선 명부가 되었느니라.”고 말씀하시고,61 전봉준은 만고의 명장이며 백의한사로서 능히 천하를 움직였다고 칭찬하셨다.62
이 사실이 알려주는 바는 상제님께서 약자들을 먼저 생각해줄 수 있는 사람을 크게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부귀한 자는 빈천을 즐기지 않으며, 강한 자는 약한 것을 즐기지 않으며, 지혜로운 자는 어리석음을 즐기지 않으니, 그러므로 빈천하고 병들고 어리석은 자가 곧 나의 사람이니라.”는 상제님의 말씀도63 이러한 지도 방침을 여실히 알려 주고 있다. 이 말씀으로부터 비록 빈천하고 병들고 어리석은 자라도 상제님의 사람이 될 수 있음은 당연히 알 수 있지만, 거꾸로 생각해본다면 비록 부귀한 자라도 강한 자라도 지혜로운 자라도 빈천을 즐기고 약한 것을 즐기며 어리석음을 즐긴다면 상제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강하고 부하고 귀하고 지혜로운 자는 ‘스스로’ 깎이게 될 것64이라는 상제님의 또 다른 말씀은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입증해준다. 쉽게 말해서 거만하지 않아야 하고, 강자가 아닌 약자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 전봉준처럼 크게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단주의 원이 바로 그랬다. 오히려 단주의 원은 전봉준의 그것보다 더 큰 것이었다고 해야 옳다. 왜냐하면 전봉준이 생각한 범위는 조선이라는 한 국가 내의 약자들을 보호한다는 것이었지만, 단주가 생각한 범위는 천하였기 때문이다. 단주의 구상이 실천으로 옮겨졌다면 앞서 언급한 대로 존왕양이존화양이 대신에 중앙과 주변을 모두 아우르는 조화로운 관계가 전통으로 전해졌을 것이고, 그 결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천하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상제님께 명을 받은 단주[丹朱受命]가 후천 역사(役事)에 있어서 전봉준보다 더 큰 역할과 일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다.
이상의 사실로 볼 때 남을 잘 되게 한다는 것, 특히 ‘힘없는 약자들’을 잘 되게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크고 대단한 일인지 깨달을 수 있다. 우리가 전봉준과 마찬가지로 단주를 수도의 중요 모델로 삼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여담을 하나 해본다. 지난 2003년부터 남방장성에서는 격년제로 국제 바둑대회가 열리고 있다. 이 대회는 특이한 게, 남방장성의 동문 누각에서 대국자들이 바둑돌을 놓으면 누각 밑에 만들어져 있는 거대한 바둑판 마당(가로 세로 각 31.7m, 약 105자[尺])에 흰 옷과 검은 옷을 입은 무술 수련생들이 착점 위치로 가서 앉아 자리를 지킨다. 그러니까 인간 바둑돌인 셈이다. 이 대회는 남방장성을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여는 홍보 이벤트이지만, 우리 수도인들에게는 재미 그 이상의 무언가를 느끼게 한다. 바둑 대국자들의 착점에 따라 인간 바둑돌이 자리 잡는 모습은 오선위기를 비롯하여 많은 풍부한 이미지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남방장성은 원 많은 묘족과 관련이 있고, 그 묘족은 단주와 연결되며, 단주는 바둑의 시조가 아니던가! 바로 그러한 장소에서 그러한 바둑 행사가 벌어진다는 게, 단순한 홍보나 재미를 넘어 어떤 심오한 뜻을 전해주는 것 같다는 건 지나친 상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