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렵 상제님께서는 차경석에게 양지 20장으로 책 두 권을 묶도록 시키셨다. 다시 상제님께서는 친히 그 책의 책장에 먹물로 손도장을 찍으시고 “이것이 대보책(大寶冊)이며 마패(馬牌)이니라.”고 하셨다. 또 나머지 한 권에는 ‘의약복서종수지문(醫藥卜筮種樹之文)’이라고 책명을 쓰시면서 “진시황의 해원도수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 책 한 권은 신원일의 집 뒷산에, 또 한 권은 황응종의 집 뒤에 묻으셨다.
중국은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 열국(列國)으로 난립하여 약육강식의 정복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역사는 이 시기를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른다. 이 혼란을 잠재우고 중국을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한 영웅이 바로 진(秦)나라의 황제 진시황(秦始皇, 기원전259∼기원전210)이었다. 진시황은 지방의 영주들이 독자적으로 자기 지역을 통치하는 봉건제를 폐지한 뒤, 천하를 36개의 군(郡)으로 나누고 군 밑에 현(縣)을 두어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관리가 각 지역을 통치하는 군현제(郡縣制)를 시행함으로써 중국 최초의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이룩하였다. 또 상업을 장려하고 도량형과 화폐를 통일하는 등 통일국가로서의 체제를 확고히 하였다. 사실상 오늘날 ‘중국(中國)이라고 하는 연합국가’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니, 이렇게 보면 통일제국의 기초를 닦은 진시황의 업적이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은 ‘분서갱유(焚書坑儒)’ 즉 각종 서적을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생매장하여 죽였다는 이유로 폭군이자 역사의 죄인으로 악명이 높았다.
상제님께서 특정한 역사적 인물의 해원공사를 보셨다고 하면, 당연히 그 역사적 인물은 어떤 원(冤)을 가졌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따라서 상제님께서 진시황의 해원도수를 보셨다는 사실에서, 진시황에게도 그간 어떤 억울한 사정이 있었음이 인정된다. 그리고 그 억울한 사정은 상제님께서 진시황 해원공사에 쓰신 글귀인 ‘의약복서종수지문’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의약복서종수지문’은 그가 일으킨 분서갱유 사건에 등장하고, 분서갱유는 진시황에게 폭군이라는 이미지를 가져다 준 대표적인 사건이다. 그렇다면 상제님께서는 분서갱유로 인해 진시황이 폭군이라는 오명을 입은 것에 대해, 진시황의 어떤 억울한 사정이 있는 것임을 밝혀주셨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진시황이 지닌 이미지를 잠시 머리에서 내려놓고 분서사건에 대해 다시 살펴보자.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인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기 전의 춘추전국시대에는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이 흥기하여 저마다의 사상을 내세우고 있었다. 통일제국 진이 들어서면서도 이런 분위기는 여전했는데, 당시 진의 승상이었던 이사(李斯)는 통일국가의 기틀이 아직 완전히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일정한 사상의 통일이 필수라고 보고 진시황에게 이렇게 건의하였다. “오늘날 폐하께서는 천하를 통일하고 사물의 가치기준을 분명히 했으며, 또 황제라는 존귀한 지위에 올라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주장이 옳다고 주장하는 자가 여전히 자취를 감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폐하가 정하신 법을 비난하고, 포고를 내어도 비난하며, 나아가서는 그 불만을 자기 마음속에만 간직하지 않고 거리에 나가서 제멋대로 떠들어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또 그들은 폐하의 명령에 이의를 표시함으로써 그것을 기화로 헛된 명예를 얻으려 하고, 군주를 비방함으로써 명성을 얻고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며, 또 도당을 만들어 이런 일로 날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무리들을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머지않아 위로는 폐하의 권위를 손상시킬 것이고, 아래로는 당파의 세력이 강성하게 될 것입니다.”06
실제로 제자백가는, 그 가운데서도 유독 유가(儒家)의 유생들은 옛날의 제도를 들먹일 뿐 건설적인 건의는 하지 않은 채 진의 통일개혁정책을 비판만 하고 있었다. 이들은 민심을 자극하여 통일제국의 기초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진의 입장에서는 위험한 존재들이었다. 또한 진이 중국을 통일하기 전의 열국의 역사기록들에는 진에 대한 비방이 많았다. 이 기록들은 진에게 멸망당한 각국의 후예들에 의해 진에 대한 적개심을 배양하는 교재로 사용될 것임이 자명했다. 이런 상황을 모두 파악한 이사는 진시황에게 다시 다음의 여덟 항목을 정책으로 시행해 나갈 것을 건의하였다.07
- 첫째,
사관이 가지고 있는 문서 중에서 진(秦)의 기록이 아닌 것은
모두 태우도록 하십시오.
- 둘째,
박사관(博士官: 학식이 뛰어난 학술고문관)이 아니면서
『시경』, 『서경』 및 제자백가의 서적을 소장하고 있으면
모두 관청에 바치게 한 후 지방관으로 하여금 태우게 하십시오.
- 셋째,
감히 『시경』, 『서경』을 들먹이며 토론하는 자는 저자거리에서 처형시키십시오.
- 넷째,
옛것을 들먹이며 현실을 비방하는 자는
족형(族刑: 삼족을 멸하는 형벌)으로 처벌하십시오.
- 다섯째,
만약 관원이 이를 알고도 벌하지 않는다면 같은 죄로 처벌하십시오.
- 여섯째,
이 법령이 하달된 후 30일이 지나도 불태우지 않는 자는 흑형(黑刑: 얼굴에 낙인을 찍는 형벌)에 처한 후 성단(城旦: 장성 건설의 노역)으로 삼으십시오.
- 일곱째,
의약(醫藥)·복서(卜筮)·식수(植樹 즉 農耕)에 관한 것은
태우지 않아도 되도록 하십시오.
- 여덟째,
만약 법령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관리를 스승으로 삼게 하십시오.
이에 따라 진시황은 의약과 복서, 농경에 관련된 책을 제외한 다른 책은 불태우게 했다. 이것이 바로 분서(焚書)사건이다. 상제님께서 쓰신 ‘의약복서종수지문(醫藥卜筮種樹之文)’은 당시 불태우지 않아도 되었던 서적들을 말하는 것이다.
진시황이 시행하도록 한 분서는 오로지 학자를 탄압하고 학문을 없애버리기 위한 의도에서 시행된 것이 아니었다. 이사의 건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학식이 뛰어난 박사관들은 유가의 서적을 비롯한 제자백가의 서적을 자유롭게 소지하고 연구할 수 있었다. 분서의 근본적인 목적은 통일제국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해 통일제국의 통일정책에 반하는 논리를 생산해내는 학문적인 흐름을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물론 분서로 인해서 일시적인 학문의 위축은 분명히 있었을 테지만, 진시황의 입장에서는 그보다는 통일제국 사회와 민생의 안정이 더욱 중요했을 것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일의 전후·본말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분서’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진시황을 폭군으로 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다음으로 유학자들을 산 채로 매장해 죽였다는 ‘갱유(坑儒)’에 대해서 살펴본다. 앞서 말한 대로, 진시황 당시의 유학자들은 통일정책에 대해 비판만 가하는 등 통일제국의 입장에서는 가시 같은 존재들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진시황은 군주를 비방하며 유언비어로 백성을 문란하게 만들고 있던 함양(咸陽) 지역의 유생들을 붙잡아 460여 명은 생매장시키고08 일부는 변방으로 유배를 보냈다.09 이것이 소위 ‘갱유’라는 것이다.
갱유는 진시황을 포악한 군주로 보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갱유사건 때 희생된 유생들의 규모가 그렇게 크지는 않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조선 선조 때인 1589년에 일어난 정여립의 기축옥사(己丑獄事) 때는 고문 끝에 죽임을 당한 선비들의 수만 해도 천 명에 달할 정도였다.10 이 외에도 갱유사건 때 죽은 희생자들보다 더 많은 희생자들을 양산한 정치적 사건을 역사에서 찾아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시황은 세간에서 오해받듯이, 전국의 모든 유생을 죽이거나 탄압한 것이 아니었다. 갱유는 함양에 국한된 것이었으며, 그 규모도 다른 민감한 정치적 사안에 비해 그리 크지 않았다. 진시황의 입장에서는 전국의 유생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군주를 비방하는 것을 징계해야만 했다. 통일제국의 기초가 아직 부실하고 정복당한 망국 유민들의 불만이 높던 시절에 유생들의 행위를 그대로 방치했을 경우, 곳곳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들불처럼 일어나 번져나갈 것임은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진시황이 선택한 방법은 제국의 수도인 함양 지역의 유생들 일부를 죽임으로써 전국의 유생들에게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었다.11 물론 이런 이유가 진시황의 갱유를 합리화시킬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의 전후와 본말을 감안하면 유독 진시황이 중국 역사에서 대규모의 인원을 생매장시킨 폭군이었다는 세간의 오해는 좀 심한 감이 있다.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단행하였으며, 그 정책 때문에 학문이 위축되고 학자들이 탄압을 받았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분서갱유가 상당히 강압적이고 극단적인 정책임은 분명했지만, 진시황의 입장에서는 통일제국의 기초를 닦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 역사는 이러한 사실을 균형 있는 시각에서 기록했어야 한다. 그래야 진시황에 대한 공과(功過)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진이 멸망한 뒤 새로 들어선 통일국가는 한(漢)이다. 한은 새 정권의 정당성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이전 정권이었던 진의 실정을 과대하게 부풀려 부각시켜야 했다. 마침 진시황은 부국강병을 위해 법가(法家)의 사상을 추구하는 입장이었고, 고루한 공론만 일삼는 유가(儒家)의 유생들을 싫어했으며 『시경』과 『서경』을 불태우기까지 했다. 한은 이것을 구실로 진시황을 폭군으로 매도했다. 당시 한은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유가의 사상을 채택하였고 역사 기록 역시 유생들의 손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진시황의 치적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각에서 평가된다는 것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12 결국 진시황은 분서갱유를 단행한 폭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만 했다. 그리고 그 오명은 무려 2천 년 동안 진시황이 손가락질 받도록 만들었다. 이런 불공평한 처우는 진시황으로 하여금 하나의 원(冤)을 품게 하기에 충분했다.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