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
시크교의 고장 암리차르
시크교의 본부 ‘황금사원(Golden Temple)’
시크교의 본 고장 ‘암리차르(Amritsar)’는 델리에서 북서쪽으로 약 451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7월 1일 낮 12시 30분에 관광버스가 출발했으니 늦어도 저녁 먹을 때쯤이면 도착하지 않을까 싶었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음날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서울에서 부산 정도의 거리를 가는데 12시간이 넘게 걸린 이유는 중간에 식사와 차 고장으로 인한 정비도 있었지만 주로 열악한 도로사정 때문이었다.
인도의 고속도로는 한쪽 방향에 2차로(펀잡지방은 비교적 부유한 동네라서 2차선이었으나 다니다 보니 1차선인 지역이 더 많았음)를 두고 있는데, 1차로는 차들만 사용하고 2차로는 자전거·오토바이·소달구지·사람 등과 같이 사용한다. 그래서 명칭은 고속도로이지만 제 속도를 내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재미있는 점은 차 뒤에 하나같이 ‘HORN PLEASE(경적을 울려주세요)’라는 문구를 써 붙이고 다니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뒤에서 경적 울리는 것을 달가워할 운전자는 없을 텐데 여기는 오히려 권장사항인 것이 의외였다. 아침에 델리 시내에서 겪었던 엄청난 소음의 원인을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중간에 고속도로 휴게소 기능을 하는 식당에 들러 저녁을 먹게 되었다. 부유한 펀잡주답게 식당의 시설이 매우 훌륭하였다. 화장실 또한 깨끗했는데 이상한 건 휴지가 걸려 있지 않았다. 그런데 비단 이곳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도 전역 어디를 가든 화장실에서 휴지를 볼 수가 없다. 대신 길쭉한 원통형의 플라스틱 바가지(어딜 가나 똑같은 모양이었다. 심지어 이웃나라인 네팔에서도 같은 걸 쓰고 있었다)가 하나씩 놓여 있는데 이걸로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을 받아 왼손으로 뒤처리를 하는 것이다. 전편에 잠깐 언급했던 인도 사람들이 반드시 오른손으로만 음식을 먹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며, 그래서 악수할 때도 왼손을 내미는 것은 결례가 된다. 인도 인구가 11억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들이 휴지를 사용하지 않음으로 해서 절약되는 목재의 양이 상당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구의 환경보호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 셈이다.
7월 2일 새벽 2시 드디어 암리차르에 있는 시크교 본부사원인 ‘황금사원(Golden Temple)’ 에 도착하였다. 지역 일대에 확성기를 통해 방송에서 익히 들어본 이슬람교도의 독경소리 같은 것이 늦은 시간임에도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이 동네 사람들은 평소에 어떻게 잠을 자나?’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버스 안에서 자다가 내린 관계로 약간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사원 안으로 들어간 순간, 여러 색깔의 전등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건물들로 인해 눈이 번쩍 떠졌다.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는 건물 군(群)의 한복판엔 굉장히 넓은 풀(pool)이 있었고 또 그 풀 한가운데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신전이(실제로는 지붕부분만 황금이고 나머지는 도금한 것) 있었다. 당시의 후덥지근한 날씨와 더불어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의 얘기 속에나 나올법한 이런 이국적인 풍경은 시크교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가 되어 지금껏 뇌리에 남아 있다.
마침 그 날은 시크교의 무슨 4백주년 기념일이라서 각지에서 모여든 신도가 발 디딜 틈도 없이 사원 안을 메우고 있었다. 남들 다 자는 새벽 시간에 예배를 드리는 모습들이 우리가 축시에 치성을 모시는 것과 비슷하여 일단 관심이 갔다.
신도들은 풀에 들어가 몸을 씻기도 하고, 그 물을 마시기도 하며, 모두가 합심하여 양동이로 물을 퍼 올려 사원 바닥을 닦기도 하였다. 풀 한가운데 있는 중앙 신전에서 절을 마치고 나온 사람들에게는, 아주 달고 느끼한, 떡 비슷한 음식을 조금씩 나누어 주는데 우리로 치자면 음복을 하는 것과 비슷한 절차 같았다. 이 모든 것을 마친 신도들은 바닥 여기저기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시크교는 16세기 초 인도 북서부의 펀잡지방에서 시작된 민족종교로서 창시자는 나나크(Nnak, 1469~1538)라는 인물이며, 현재 인도 내에서 약 2,300만 명(인도 인구의 약 2%) 정도의 신자를 가지고 있는 소수종교이다. 시크교가 성립되던 16세기 초는 인도 북서부를 통해 인도에 침입한 이슬람세력이 기존의 힌두왕조를 몰아내고 펀잡지방 인근의 델리에 무굴제국(1526~1857)을 건립한 때였다. 따라서 시크교는 인도 전통의 힌두교와 외래종교인 이슬람교가 적절히 조화된 형태를 띠고 있다.
윤회사상과 업을 기본으로 하고 현세 자신의 직업을 통해 선행축적을 장려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힌두교에 가깝지만, 국민의 83%를 차지하는 힌두교도 누구나가 믿고 있는 브라흐마(창조의 신), 비슈누(법의 신), 시바(파괴의 신) 같은 신을 믿지 않고 유일신 할리를 믿는 점, 카스트를 전면 부정하고 인간의 평등을 강조하는 점 등은 이슬람에 가깝다.
하지만 하층 계급의 폭발적인 지지에 힘입어 세(勢)가 급속하게 확대된 시크교는 당시 인도의 지배세력이었던 이슬람왕조(무굴)의 경계심을 자극하여 심한 탄압과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시크교도들 또한 탄압에 대해 무력(武力)으로 맞대응하였으므로 공공연한 전쟁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는데, 이는 결국 무굴제국의 멸망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오랜 기간 동안 무력투쟁의 전통을 가진 시크교도들은 영국군의 용병으로 1차세계대전시 많은 활약을 하였다. 덕분에 이후에도 각국 요인들의 경호원으로 다수 활동하고 있으며, 인도의 군대 내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근면한 시크교도들은 펀잡지방을 인도에서 제일 잘 사는 고장으로 만들었다. 경제력 덕분인지 아니면 종교적 신념 때문인지 아무튼 인도 내에서 시크교도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속이는 일은 좀처럼 없다는 평을 듣고 있었으며, 고용주들의 입장에서도 선호도가 높은 일꾼이었다.
또 영화 등을 통해서 보아 온 인도인의 상징인 터번은 실제로는 시크교도의 상징이었다. 힌두교를 믿는 대부분의 인도 사람들은 터번을 쓰지 않는다. 시크교도들은 신에게 머리칼을 보이는 것을 불경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에 사원에 들어갈 때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에서도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생활한다. 처음엔 ‘안 그래도 더운 날씨에 고생스럽겠다.’하고 생각했는데, 며칠 지나고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인도의 한여름 날씨는 50℃에 육박할 만큼 뜨겁다. 이럴 때 길에 돌아다니려면 강력한 햇빛을 차단해주는 터번이 오히려 머리를 보호하고 일사병도 예방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얇은 모자를 써 보니 오히려 안 쓴 것보다 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