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의 유상팔백주와 박전십오경에 대하여

기획할방 (신선) 2018 春
 - 제갈량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에 대한 상제님의 진단


 

▲제갈공명


1. 위천하자(爲天下者) 불고가사(不顧家事)

 

제갈량이 성공하지 못한 원인에 대한 기존의 논의를 보면 상제님과 같은 시각으로 그의 실패가 거론된 적은 없었다. 따라서 “위천하자(爲天下者)는 불고가사(不顧家事) 라 하였으되 제갈량(諸葛亮)은 유상팔백주(有桑八百株)와 박전십오경(薄田十五頃)의 탓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느니라.”는 상제님의 독특한 해석이며 진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제님께서 제갈량이 성공하지 못한 원인을 이와 같이 진단하신 까닭은 무엇일까.

 

이제 교법 2장 52절의 구절을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위천하자는 불고가사’라는 말은 ‘천하의 일을 도모하는 사람은 가사를 돌볼 겨를이 없다’로 이해된다. 천하사를 도모하는 사람이 가사를 돌볼 겨를이 없는 것은 그들이 너무나도 바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도저히 가사를 챙길 정신적, 시간적인 여유가 그들에게는 없는 것으로 이는 의도적으로 가사를 돌보지 않는 것과는 구별될 것이다.

 

여기서 구년 홍수에서 치수(治水)를 맡았던 우(禹)와 삼국 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에 대해서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우임금에 대해 살펴보자. 『사기(史記)』에 의하면 하(夏)나라를 세운 우(禹)는 그의 부친이 곤으로 순(舜) 임금 밑에서 치수(治水)를 담당하였는데 성공하지 못하고 우산(羽山)으로 추방되었고 거기서 죽게 되었다. 우는 아버지인 곤의 뒤를 이어 치수를 맡게 되었는데 총명하고 의욕이 왕성하며 매우 부지런하였다고 한다.

 

『사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우는 부친이 치수사업에 실패하여 처벌 받은 것을 슬퍼하였으므로 노심초사하여 일하느라 밖에서 13년을 지내면서도 자기 집 대문 앞을 지나가며 감히 들어갈 수 없었다.   

우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도산씨(途山氏)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나흘 만에 집을 떠나게 되었으며, 아들 계(啓)가 태어나도 돌보지 못했습니다. 이로써 치수사업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우에게 있어서 치수사업의 성공은 국가적 대사이면서 부친의 오명을 벗겨드리는 일이 된다. 그는 결혼하고 나서 신혼이랄 것도 없이 치수사업에 전념하게 되었고 당연히 자식이 태어나도 돌볼 수 없었다.

 

오직 치수사업에서의 성공만이 오명(汚名)을 쓰고 돌아가신 부친의 혼을 위로하고 자신의 가문을 보존하는 일이 되는 상황에서 그의 마음에는 치수사업 이 외에 그 어떤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치수 사업에서 성공함으로써 하나라를 창업하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김유신에 대해 살펴보자.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3월에 돌아와 왕궁에 복명하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는데 또 급보가 있었다.(중략) 왕은 다시 유신에게 말하기를, “공은 수고를 꺼리지 말고 빨리 가서 그들이 이르기 전에 대비하라.” 하므로 유신은 또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군사를 훈련시키고 무기를 수선하여 서쪽으로 향하였다. 그때 그 집 사람들이 모두 문 밖에 나와 오기를 기다렸으나 유신은 문을 지나치면서 돌아보지 않고 가다가 50보쯤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집의 장수(漿水)를 가져오게 하여 마시며 말하기를, “우리 집 물이 여전히 예전 맛이 있다.” 하였다. 이에 군중들이 모두 말하기를, “대장군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우리가 어찌 골육(骨肉)의 이별을 한으로 삼겠는가.” 하였다.

 

김유신은 거듭되는 전쟁으로 자기 집 앞을 지날 때조차 집에 들르지 못했고 집을 지나치고 나서야 마상(馬上)에서 장수(漿水)를 마시며 “물맛이 여전하니 내 집에 아무런 일이 없구나”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으로 여러 장졸(將卒)들의 마음을 안정시킨 것이다. 계속되는 전쟁이었고 그 누구도 쉽게 가족을 돌볼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총사령관인 김유신이 이렇게까지 하는 데에는 모든 장졸들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왕은 400년 하나라의 창업자이고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 자신이 맡은 숙명의 과제를 완성하기 위해 가사는 고사하고 집에 잠시 머물 시간도 없었던 것이다. 일을 맡은 총책임자가 이렇듯이 잠시 집에도 들르지 못하고 일에 임하는데 그와 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떠했을 것인가. 아마 누구도 가사를 이유로 쉽사리 자신의 일에서 빠지지 못했을 것이며 또한 장기간 가사를 돌보지 못하는 일로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우왕과 김유신은 그들 자신의 성공과 실패가 개인의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흥망에 직접적 관련이 있는 인물들로 위천하자라 할 만하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개인적인 가사를 돌볼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전혀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성공에 국가의 흥망이 걸린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위해 가사는 고사하고 잠시 집에 들르는 것도 그들 스스로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마음 자세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일심이라고 할 것이다. ‘위천하자는 불고가사’라고 했을 때 이는 일심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이다.

 

2. 유상팔백주(有桑八百株)와 박전십오경(薄田十五頃)

 

이제 ‘유상팔백주(有桑八百株)’와 ‘박전십오경(薄田十五頃)’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유상팔백주’는 뽕나무 800그루를 말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농잠(農蠶)이라고 하여 농사와 양잠(養蠶)을 중요한 국가정책으로 추진하고 있다. 나라에서는 양잠을 장려하기 위하여 직접 잠실(蠶室)을 설치하여 모범을 보이기도 했는데 현재 서울에 있는 ‘잠실(蠶室)’은 조선시대에 그곳에 잠실을 설치하여서 유래된 지명으로 아직 그 지명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도 양잠이 얼마나 중시되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양잠에 있어서 적절한 시기의 뽕잎 공급은 양잠의 성패를 좌우할 정도의 중요한 일이었다. 누에는 성장해 탈피하면서 매번 여러 차례 많은 양의 뽕잎을 먹기 때문에 뽕잎이 부족한 경우 제대로 된 누에고치를 생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뽕잎이 부족하면 이를 사서라도 보충해야 했다.

 

이를 통해 볼 때 뽕나무 800그루라면 제갈량과 그 일족은 충분히 비단 옷을 입을 수 있는 기반은 충분히 마련된 것이다.

 

다음으로 ‘박전십오경’에서 대해서 알아보자. 15경의 땅이 어느 정도의 규모였는지를 알아 보기 위해 보(步), 묘(畝), 경(頃)을 자전(字典)에서 찾아보면 아래와 같고 이를 토대로 박전(薄田) 15경(頃)을 계산해보면 다음과 같다.

 

1척(尺) = 19.5㎝ = 0.195m

1보(步) = 사방 6척(尺)

= (6×0.195)×(6×0.195)

= 1.3689㎡

 

1묘(畝) = 100보(步)

= 100×1.3689㎡ = 136.89㎡

15경(頃) = 15 × ( 100묘 )

= 15×(100×136.89㎡)

= 205,335㎡

 

그런데, ㎡×0.3025 = 평(坪)

= 205,335㎡ × 0.3025

= 62,113.8평(坪)

 

위의 계산에 따르면 15경(頃)을 평(坪)으로 환산하면 62,113평이 된다. 그리고 당시는 시비법(施肥法)이 현대처럼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2년 경작하면 1년 휴경(休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1년을 단위로 보면 6만평의 2/3인 약 4만평 정도를 활용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제갈량의 ‘유상팔백주(有桑八百株)’와 ‘박전십오경(薄田十五頃)’은 결코 적은 재산이 아니었다. 다음 구절을 보자.

 

이전에 제갈량이 후주 유선에게 표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성도(成都)에는 뽕나무 8백 그루와 박전(薄田) 15경(頃)이 있으므로 제 자손의 생활은 이것으로 여유가 있습니다. 신이 밖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에는 특별히 조달해 줄 필요가 없고, 몸에 필요한 의식은 모두 관부에서 지급해 주므로 다른 산업을 경영하여 약간의 재산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신이 죽었을 때, 저의 집안에 남은 비단이 있거나 밖으로 여분의 재산이 있어 폐하의 은총을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죽은 후에 그가 말한 것과 같았다.

 

그런데 여기서 박전(薄田)이라는 말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때 박전의 뜻은 진정으로 메마른 땅이란 의미보다는 겸양의 뜻이 들어간 것으로 “변변치 못한 땅이 15경 있습니다.”라는 의미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의 재산은 그 형성과정도 비교적 명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을 보자.

 

건안 19년(214) 유비가 성도를 포위한지 수십 일 만에 유장은 성에서 나와 항복했다. 촉은 풍요롭고 생산물이 풍부한 곳이었으므로, 유비는 주연을 열어 병사들을 위로하고, 성 안에 있던 금과 은을 취해 장수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위의 내용은 유비가 익주(益州)를 차지하고 난 이후의 모습을 설명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볼 때 제갈량은 유비를 도와 수많은 공훈을 세우게 되는데 그 논공행상(論功行賞)의 과정에서 많은 상급(賞給)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촉의 고위 관료였던 그가 받은 녹봉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제갈량의 ‘유상팔백주’와 ‘박전십오경’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보면 적은 재산이 아니었지만 제갈량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해 볼 때 실로 미미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로 인해 성공하지 못했다고 상제님께서 진단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일심(一心)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제갈량이 후주 유선에게 올린 표(表)를 보면 ‘이것으로 제 자손의 생활은 여유가 있습니다.’란 구절이 있다. 이를 보면 그는 어느 정도의 재산을 후손들에게 남김으로써 어떤 경우라도 자손들의 생활은 보장된다는 점에서 안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함지사지이후(陷地死地而後)에 생(生)하고 치지망지이후(致之亡地而後)에 존(存)한다.”는 말씀도 있다시피 절박한 지경에 이르면 누구라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할 수밖에 없고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저력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안도하는 마음과 이 정도면 되었다는 마음에서는 아무리 맹세가 크고 깊다 해도 쉽사리 자신의 저력이 나올 수는 없을 것이며 또한 신명의 음호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제갈량의 표(表)에서 언급된 ‘유상팔백주’와 ‘박전십오경’은 지금까지 그의 청렴결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가족들에게 어느 정도의 재산을 남김으로서 안도하였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그의 이러한 마음을 일심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으로 상제님께서는 이와 같이 일심(一心)이 되지 못한 그의 마음을 지적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제갈량이 성공하지 못한 원인으로 앞서 언급하였듯이 여러 가지가 나열되고 있지만 현실적인 국력의 열세가 가장 큰 이유로 꼽히고 있다. 그리고 그 외의 이유는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일심(一心)이면 그 어떤 불리한 조건도 극복할 수 있음을 상제님의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典經』을 보면 ‘상제께서 최 익현(崔益鉉)이 순창에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라사대 “일심의 힘이 크니라. 같은 탄알 밑에서 임 낙안(林樂安)은 죽고 최 면암(崔勉菴)은 살았느니라. 이것은 일심의 힘으로 인함이니라. 일심을 가진 자는 한 손가락을 튕겨도 능히 만리 밖에 있는 군함을 물리치리라” 하셨도다.(교법 3장 20절)’는 구절과 ‘이제 범사에 성공이 없음은 한 마음을 가진 자가 없는 까닭이라. 한 마음을 가지면 안되는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무슨 일을 대하던지 한 마음을 갖지 못한 것을 한할 것이로다. 안되리라는 생각을 품지 말라.(교법 2장 5절)’는 구절이 그것이다.

 

따라서 “위천하자(爲天下者)는 불고가사(不顧家事)라 하였으되 제갈량(諸葛亮)은 유상팔백주(有桑八百株)와 박전십오경(薄田十五頃)의 탓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느니라”는 구절은 제갈량은 그가 남긴 ‘유상팔백주’와 ‘박전십오경’의 탓으로 성공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남긴 재산으로 볼 때 그는 대사의 성공보다 가족의 장래를 먼저 염려했었던 것이다. 이는 대사를 담당한 사람이 가져야 할 일심이라는 범주에서 보면 이탈한 것으로 이것이 그가 성공하지 못한 원인인 것이다.  

 

 글 : 상생의 길 - [ 제갈량의 생애와 그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 내용 중 발췌   


할방 (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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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제 2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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