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2004년에 히말라야에서 일어났던 조난사고를 소재로 한 영화 ‘히말라야’가 개봉되어 많은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고 있다. 극한의 환경 속에서 가까스로 걸음을 옮기던 산악인들이 남긴 그 무엇이 수백만의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일까? 어쩌면 사람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아 ‘눈이 사는 곳’, ‘신(神)이 허락해야지만 오를 수 있는 곳’ 으로 불리는 히말라야에 그들 산(山)사람들이 신의 뜻에 합당한 무엇인가를 남기고 온 것 때문이 아닐까? 얼어서 천년만년 세월을 보낼 그것은 신이 함께하는 것이며 고스란히 산이 되는 것으로 1,000만에 가까운 관객을 불러 모으기에도 충분한 것일지 모른다.
‘히말라야’는 2004년, 계명대학교 개교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기획된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박무택이 대장으로 참여하여 정상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하던 중 설맹(雪盲)으로 조난사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산악대장 ‘엄홍길’과 후배 산악인 ‘박무택’을 중심으로 흐르던 영화는 무택의 조난과 그를 구조하기 위해 산을 오르는 ‘박정복’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영화에 등장하는 엄홍길과 박무택은 실명이고 박정복은 백준호(당시 37세)의 가명이다.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설산(雪山)과 녹음(綠陰)이 우거진 한국의 여름 산을 오가면서 시작된다.
영화는 박무택이 자신보다 커 보이는 짐, 수경(水鏡) 속에서 헐떡거리는 호흡, 바위에 매달려 자는 야영(野營) 등을 통해 산악인으로 거듭나는 것을 조명한다. 그러나 산악인 무택의 이미지는 강인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옥의 칼날처럼 서 있는 히말라야의 얼음산과 비교하여 한없이 나약하고 어쩌면 너무 선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 영화는 훈련을 통해 만들어지는 초인적인 산악인에 주목하지 않은 듯하다. 차라리 엄대장과 결합(結合)되어 나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고 보인다. ‘뭐 저런 놈이 있어?’ 하던 ‘남남’에서, ‘너와 나’로, ‘선후배로’, 다시 선후배에서 ‘형과 아우’로, 그리고 죽은 후에는 한 몸이 되어 엄대장의 힘이 되어주는 ‘하나의 관계’로 말이다. 그런 사람이 또 하나 있었는데, 그가 바로 ‘백준호’이다.
엄홍길씨는 한국 등반대 사상 최고의 위대한 등반은 박무택 대원을 구조하기 위해 8,700m의 데스크 존을 뚫고 등반한 백준호 대원의 산행이라고 말한다. 영하 30도의 칼바람이 부는 암흑천지의 밤. 구조해 돌아올 가능성은 0%. 주위에서 모두가 포기했을 때 “그가 거기에 있지 않으냐?”며 기어코 올라가 천신만고 끝에 친구를 찾았지만 결국 그를 만지면서 “무택이가 밤새 무산소에 노출돼 손과 코에 동상이 심합니다. 저도 체력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구조가 어렵습니다.”라는 교신을 끝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등반을 말이다. 현실적으로 돌아올 수 없는 길, 속되게 ‘곰탱이’가 아니고는 누구도 가지 않을 길이었다. 이런 길을 최고의 등반이라고 극찬한 것은 고생스런 산행에서 자신의 ‘제 얼굴’을 보았다는 산사람들이다.
신(神)이 사는 산(山). 그리고 산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 단순히 험난한 산에서의 조난을 다룬 외국영화와 다르게 이 영화는 조난사고를 도구 삼아 ‘하나 되어 나가는 인간’을 그리고 있다. 그것이 현실에 오염되지 않은 진주(眞珠)로 태어나 인정(人情)이 말라버린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카타르시스의 눈물로 위로를 주는 것은 아닐까? 어둠이 짙을수록 등불이 소중하듯 정(情)이 없을수록 우리는 돌아가 같이하고 싶은 인간애를 찾는다. 엄대장이 원정대를 꾸려 얼어있을 무택이를 데려오자는 말에 겨우 잡은 직장 다 때려치우고 다시 모이는 휴먼원정 대원들. 안락한 생활에 빠져 버릴 수 있는 현실에서 삶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 산(山)사람들이었다.
인간성은 자타의 구분이 없는 것으로, 유교에서는 인(仁)으로 불린다. 남의 불행을 보고 모르는 척하고 지나칠 수 없는 마음이다. 불교로는 보살심(菩薩心)이다. 너와 나의 구분이라는 상(象)을 짓지 않는 마음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여기는 것이다. 종교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요구했던 요지(要旨)는 같다. 모두 마음으로부터 자타의 구분을 두지 말라는 것이었다. 시랜드 참사에서 아이를 둔 부모들이 느꼈던 감정, 세월호의 아이들 소식에 온 국민이 느꼈던 감정의 발로처럼 누가 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부여받아 즉발(卽發)하는 마음은 너와 나의 구분이 없는 ‘하나 된’ 마음이었다. 인간이 공동으로 지니고 있어 ‘인간의 조건’이 되는 양심(良心)이 바로 그것이다.
영화 ‘히말라야’에서 무전으로 “구조해 달라.”고 외쳤던 것은 바로 ‘하나이지 않느냐?’라는 이러한 마음에 대고 한 소리가 아닌가?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 순간에 ‘그가 거기에 있다’며 올라간 사람이나, 엄대장에 호응해 휴먼원정대를 꾸려 다시 산에 오른 이들이나. 살아남은 자들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그들에게 뜨거운 눈물로 호응하는 관객들이나.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하나’라는 마음이 자극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나라가 남북으로, 상하로, 좌우로 분열된 현실은 이러한 인간 양심에 의한 것이 아니다. 히말라야의 바람 앞에서는 아무 필요 없는, 그래서 신의 세계에서는 다 버려야 할 거짓된 얼굴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정복이와 재헌이가 내 허파와 심장이 되고 무택이가 내 다리가 되어주었다고 믿는다.”는 엄대장의 말은 비극적이지만 아름답다.
진리는 아름답게 존재한다. ‘남남’이라는 분열의 추(醜)함을 뚫고 나온 ‘하나 됨’의 영화로 ‘히말라야’는 상처 입은 세상에 영롱하게 빛나는 진주가 아닐 수 없다. 자신들의 희생으로 인간의 하나 됨을 자극한 영화 ‘히말라야’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글 : 대순진리회 연구위원 백경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