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감록』 속 해도진인설의 허와 실

기획할방 (신선) 2018 春

도주께서 해인사에서 돌아오신 다음날에 여러 종도들을 모아 놓고 “상제께서 해인을 인패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여 어떤 물체로 생각함은 그릇된 생각이니라. 해인은 먼 데 있지 않고 자기 장중(掌中)에 있느니라. 우주 삼라 만상의 모든 이치의 근원이 바다에 있으므로 해인이요, 해도 진인(海島眞人)이란 말이 있느니라. 바닷물을 보라. 전부 전기이니라. 물은 흘러 내려가나 오르는 성품을 갖고 있느니라. 삼라 만상의 근원이 수기를 흡수하여 생장하느니라. 하늘은 삼십 육천(三十六天)이 있어 상제께서 통솔하시며 전기를 맡으셔서 천지 만물을 지배 자양하시니 뇌성 보화 천존 상제(雷聲普化天尊上帝)이시니라. 천상의 전기가 바닷물에 있었으니 바닷물의 전기로써 만물을 포장하느니라”고 말씀하셨도다. (교운 2장 55절)

   

 

    

인간은 여전히 일정한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으며 삶을 영위해 가는 존재이다. 그런 까닭에 불투명한 미래를 엿보고 싶은 인간의 욕구는 본능적 욕망만큼이나 강렬하다. 이러한 바람은 비결이라는 예언서를 추종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그 대표적인 한국의 예언적 도참서(圖讖書)가 『정감록(鄭鑑錄)』일 것이다.

 

『정감록』은 여러 가지 감결류(鑑訣類)와 비결서(祕訣書)의 집성이며 이본(異本)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그 저자나 성립 시기에 대해서도 분명하지 않다. 전반적인 내용은 도참설과 풍수지리, 도교사상이 원융되어 이망정흥설(李亡鄭興說), 십승지설(十乘地說), 해도진인설(海島眞人說) 등의 비결이 중심을 이룬다. 그러나 조선의 역사적 기록에서 이 개별적 비결은 『정감록』이라는 책보다 먼저 유행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해도진인설은 『정감록』에 응축된 핵심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정감록』은 ‘이씨(李氏)가 망하고 정씨(鄭氏)가 일어난다.’는 역성혁명의 논리에 기반을 두는데, 이 이망정흥설은 해도진인설과 결합하면서 더욱 강하게 현실체제를 부정하고 새로운 이상형을 염원하는 논리를 담게 된다. 이로 인해 해도진인설은 조선 후기의 그 어떤 체제 저항 논리보다 민초들에게 강력한 영향력과 호소력을 발휘하였다.

해도진인설이란 ‘해도(海島)’와 ‘진인(眞人)’의 합성어로, ‘바다 가운데 있는 섬에서 진인이 출현한다.’는 도참이며 예언이다. 이른바 해도에서 진인이 출현하여 새로운 이상사회[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이 대강의 요지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언이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을까. 먼저 진인출현의 이야기는 다양한 추측이 가능하지만, 구원자에 대한 기대 심리에서 그 배경을 찾을 수 있다. 조선 후기 구원자 또는 메시아 출현에 대한 민중의 기대는 도참(圖讖)사상을 통해 나타난다. 도참은 왕조의 흥망성쇠나 인간의 길흉화복을 징험하는 예언과 비기를 총칭하며 신앙적 성격이 강하다.01

 

이는 조선의 건국을 정당화한 역성혁명(易姓革命)의 논리였으나, 15세기 후반 성리학이 지배이념으로 정착하면서 금기(禁忌)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국문학자 조동일 교수는 16세기 진인출현의 도참은 누구의 조작이기 이전에 “민중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이야기”라고 보며, 진인을 “세계와의 대결을 준비하고 있으며, 대결이 벌어진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으로 인정되는 인물”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전래 설화인 사라진 아기장수의 유언비어가 과장되어 진인의 출현설로 발전하였다고 본다.02

실제로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전반까지 반 왕조적 상징성을 가진 인물이나 그들의 후손을 진인으로 내세운 각종 변란이 빈발하게 일어났다.03 특히 17세기에 이르러 도참은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의 잇따른 외적의 침입을 계기로 정국과 민심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전쟁의 폐해가 국가사직의 존망과 생민의 생사를 좌우하게 되면서 민중의 바람은 구원자의 출현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로 나타난다.

 

17세기 중반 이후는 진인출현설과 이망정흥설이 결합함에 따라 다양한 성씨로 지칭되던 진인은 새로운 성씨로 바뀌게 된다. 그들은 동조자의 포섭과 변란의 유리한 전개 상황을 위해 정씨(鄭氏) 성을 가진 인물로 구체화한 것이다.

민중의 메시아인 진인은 왜 해도(海島)라는 장소에서 올 것인가. 그 믿음의 출현에는 몇 가지 근거가 제기되어 왔다. 17세기 말까지 진인의 출현은 주로 육지를 중심으로 하였으나 18세기에 이르면 해도가 이를 대신한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다양한 이유로 해도에 유입된 이주민이 증가한 사실에 바탕을 둔다. 양란(兩亂) 이후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변동의 모순은 빈농층과 몰락농민층의 유망(流亡) 현상을 초래한다. 이와 함께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자연재해, 기근, 전염병은 이들의 유망 현상을 더욱 확대했다.04 그중에서 많은 유민이 해도로 유망하여 삶의 길을 찾고자 했다.05 특히 서·남해는 동해보다 해도가 많고, 어염(魚鹽)이 풍부해 생업에 유리할 뿐만 아니라 재부(財富)를 쌓기에 용이했다.

 

그러한 연유 때문인지 『영조실록』에는 “섬 가운데 거주하는 백성들이 번성하고 생활이 풍족하여 육지의 백성들보다 나았습니다.”06라는 균세사(均稅使)의 보고가 눈에 띈다. 이러한 정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섬이 곧 살기 좋은 땅으로 인식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또 다른 근거는 중앙정부의 통제가 미흡했던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있다. 18세기 중반까지도 해상의 섬은 역모 관련 범죄자나 도망간 노비(奴婢)의 주된 도피처의 역할을 했다.07 이들의 무리가 점차 저항 세력화를 추진하였지만, 정부는 그들의 무장능력을 파악할 수 없었다. 이에 해랑도(海浪島)와 해랑적(海浪賊)은 해상의 불법세력을 대표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해도로부터 위협은 국내뿐만 아니라 대마도(對馬島)를 비롯한 국외에도 상존하고 있었다.08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조선 정부는 해적의 출현에 대비하여 해상 방위의 긴장을 놓을 수 없었고,09 민중 또한 변고의 두려움에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10

이처럼 유민의 이주증가와 중앙정부의 통제가 어려운 해도는 구체적 사실과 상상이 더해져 변란을 준비하고자 하는 세력에게 그 이용가치를 높여주었다. 역사의 기록에서 최초의 해도진인설은 1694년 집권층의 정권 다툼 과정에서 언급된다. 당시 폐비 민씨[인현왕후]의 복위를 반대하던 남인(南人)이 화를 입어 실권하고 서인(西人)이 재집권한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있었다. 환국의 주도 인물인 한구가 다수의 동조자와 거사 자금을 모으기 위해 ‘해도에 정씨진인이 출현한다.’는 유언비어를 유포했다.11 이후 해도진인설은 1748년 ‘청주·문의 괘서(掛書)사건’에서 다시 나타난다.

      

몰락 양반인 이지서가 청주와 문의에서 해도진인설을 유포하여 당시 충청도와 경기도의 백성들이 동요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의 개요는 망명 역적인 황진기가 장군이 되어 정진인(鄭眞人)을 모시고 빈천한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울릉도 월변의 섬에서 나온다는 이야기이다.12 이 두 사건은 해도진인설이 유포자와 그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변용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1782년(정조 6년) 11월 충청도 진천에서 일어난 ‘이경래·문인방 사건’은 왕조전복을 목적으로 일어났다. 특히 이들은 해도진인설과 함께 『정감록』을 사상적 기반으로 거사(擧事)를 준비하였다. 이때부터 『정감록』의 이름이 『조선왕조실록』에 본격적으로 거론된다. 이후에도 1785년(정조 9년) 경상도 하동에서 일어난 ‘이율과 양형의 반란음모사건’, 1787년(정조 11년) 제천에 살던 ‘김동익의 역모사건’과 1801년(순조 1년) 여주에 살던 ‘강이천의 반란음모사건’이 일어난다. 이 반란과 관계된 해도진인설의 주역은 주로 정치권력에서 배제된 몰락 양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민란, 즉 농민항쟁과정에서도 해도진인설의 논리가 인용되었다. 1811년(순조 11년) 12월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에서 “해도[홍의도(紅衣島)]에서 정진인[성인(聖人)]이 군사를 이끌고 새 나라를 세운다.”고 주장하였다. 관군과 4개월간의 전투 끝에 2천여 명에 가까운 봉기군들이 참수되었다.

 

홍경래의 난을 이후로 해도진인설이 당시 서북지방에서도 광범위하게 유포되기 시작한다. 1817년(순조 17년) 3월 행상하던 채수영이 홍경래 불사설(不死說)을 주장하였고, 1826년(순조 26년) 5월 충주에서 흉서(凶書)를 내걸었던 김치규 사건과 10월에 유언(流言)을 퍼뜨린 정상채 사건은 홍경래 불사설과 관련된 해도진인설을 유포하였다. 근대 이후인 대한제국 2년(1898년)에 발생한 제주도 농민항쟁 때에도 해도진인설이 이용되었다. 이외에도 해도진인설은 『정감록』 속의 남조선사상, 정씨출현설, 미륵신앙 등 여타 비결과 습합되어 근대 한국 신종교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기도 했다.

난세 때마다 『정감록』 속의 예언과 비결은 오랫동안 생명을 가지고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고 증거이다. 그 과정에서 해도진인설은 질곡과 절망의 시대에 민중이 역사변동의 주체를 담당했다는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민심이나 여론을 조작하는 유언비어의 원천으로 지목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처럼 긍정과 부정이라는 양가적(兩價的) 평가의 이면에는 또한 도참의 허와 실의 양면성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양면성으로 인해 해도진인의 도참은 혹세무민의 유언비어와 이상세계의 동경이 교차점을 이루며 사람들의 기억에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이상 사회에 대한 꿈과 동경은 인류의 오랜 소원이다. 살기 좋은 땅, ‘해도’와 관련하여 이상 국가를 연상시키는 민중들의 소박한 꿈들이 18,19세기의 정부에 대한 항쟁과 농민항쟁의 추동력 속에 담겨 있었다. 그들의 소망은 문학작품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에서의 ‘율도국(硉島國)’이 가장 전형적인 사례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시작된 해도진인설은 주로 유언비어나, 괘서 또는 거사모의(擧事謀議)와 같은 ‘변란’을 통해 유포되었다.

 

그런 이유로 혹세무민의 유언으로 지목되어 줄곧 탄압과 금기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수많은 생민(生民)이 이상세계를 그리다 변란과 폭동의 죄목으로 안타까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러한 기억의 잔상들이 진정 민중들의 꿈이며 진실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조선 말기에 이 땅에 오신 상제님의 모든 노정(路程)은 민중의 아픔으로부터 시작한다. 당시 동학군의 전봉준(全琫準: 자는 명숙)을 만고명장(萬古名將)이자 백의한사(白衣寒士)로 높이셨지만 민중들이 갑오년(1894) 무장혁명에 가담하는 것을 반대하셨다. 이는 힘없는 민중이 무장투쟁에서 희생되는 참담함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의 존재가 하늘만큼 높다는 인존(人尊)의 가치가 투영된 것이다.

 

어쩌면 민중들이 바라는 해도진인설의 궁극적 목적은 이러한 인존세상이 아닐까. 이에 대한 대답을 도주님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경』에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이치의 근원이 바다에 있으므로 해인이요, 해도진인(海島眞人)이란 말이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이처럼 해도진인은 ‘해인(海印)’과 함께 언급되며 만물 이치의 근원이 담긴 ‘바다’와 관계된 것이다. 바다는 수기(水氣)이며 전기로 구체화된다. 상제님께서는 그러한 전기를 맡으셔서 천지만물을 지배 자양하신다. 여기서 바다는 만물 이치의 근원, 물의 연원, 전기 등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며 이러한 것을 주관하는 분이 상제님이시다. 따라서 해도진인은 상제님의 강세(降世)를 묘사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해인’과 같이 궁극적인 진리로 파악된다.

 

해인은 수수(授受)하는 물건이 아니라 장중(掌中)에 있는 것, 즉 대순진리와 그 진리가 체현된 상태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해도진인은 상제님께서 대순하신 진리인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으로 이해된다.

 

혹자는 해도진인설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이유를 실제로 해도진인이 출현하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출현할 수 없는 모호성에 있다고 한다. 이러한 평가와 물음에는 도주님께서 말씀하신 해도진인이 그 해답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울러 도참을 민의(民意)의 소재로 파악한다면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라는 말이 된다. 아마도 그들이 꿈꾸던 이상 국가와 사회는 상극으로 점철된 선천세계가 아닌 상생으로 이루어진 무위이화(無爲而化)의 후천세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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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양은용, 「도참사상과 정감록」, 『최고여성지도자과정 강의논집』 1 (1996), p.1.

02 조동일, 『민중영웅이야기』(서울: 문예출판사, 1992), pp.86-107.

03 김우철, 「조선 후기 변란에서 정씨 수용과정」, 『조선시대사학보』 60 (2012), p.88.

04 김성우, 「17세기의 위기와 숙종대 사회상」, 『역사와 현실』 25 (1997), p.23.

05 변주승, 「18세기 유민의 실태와 그 성격」, 『전주사학』 8 (1995), pp.75-88.

06 『영조실록』, 27년(1751) 2월 21일.

07 『영조실록』, 7년(1731) 1월 4일, 9년(1733) 11월 4일, 33년(1757) 5월 4일. 이외에도 『조선왕조실록』에는 국가에 대항하여 반란과 역모를 꾀한 자를 섬에 유배시킨 일이 수없이 많았다.

08 『숙종실록』, 10년(1684) 3월 11일.

09 『숙종실록』, 28년(1702) 12월 20일, 29년(1703) 3월 18일, 31년(1705) 1월 15일, 43년(1717) 4월 1일.

10 『숙종실록』, 37년(1711) 7월 15일.

11 『숙종실록』, 20년(1694) 4월1일, 9월 11일.

12 『영조실록』, 24년(1748) 5월 21~25일.


할방 (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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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제 2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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