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제님의 괴질(怪疾)대속 공사

기획비상 (날개) 2019 秋

 

 

이 무렵에 괴질이 청주(淸州)와 나주(羅州)에 창궐하여 인심이 흉흉한지라. 상제께서 “남북으로 마주 터지니 장차 무수한 생명이 잔멸하리로다”고 말씀하시고 글을 써서 괴질신장에게 “호불범 제왕 장상지가 범차 무고 창생지가호(胡不犯帝王將相之家 犯此無辜蒼生之家乎)”라 칙령하시고 “내가 이것을 대속하리라”고 말씀하시니라. 상제께서 형렬에게 새 옷 다섯 벌을 급히 지어 오게 하시니라. 가져온 옷으로 상제께서 설사하시면서 다섯 번 갈아입고 “약한 자는 다 죽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도다. 이후부터 그 괴질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없어졌도다. (제생 23절)

 

‘괴질’이 청주와 나주에 창궐했다는 소식이 전국 각지로 퍼져나가자 조선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를 매우 안타까워하신 상제님께서는 그대로 두면 무수히 죽어갈 창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괴질’을 대속하고자 하셨다. 괴질 신장에게 “어찌 제왕이나 장군, 재상의 집은 범하지 않고, 이 무고한 창생의 집을 범하는가?”라고 칙령을 내리시고 ‘괴질’을 대속하신 이후 남북에서 마주 터지던 ‘괴질’의 기세는 점차 약해지다가 마침내 사라졌다.

 

한번 발생하면 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무서운 질병, ‘괴질’. 조선을 두려움 속에 몰아넣었던 이 질병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괴질’의 정체

 

일반적으로 ‘괴질(怪疾)’이란 ‘원인을 알 수 없는 기이하고 요상한 병’으로 원인불명의 질병을 일컫는다. 『전경』을 살펴보면 이 ‘괴질’이라는 단어는 제생 23절에 단 한 번 등장한다. 이 구절에는 상제님께서 ‘괴질’을 대속하시면서 설사를 하셨다는 기록만 있을 뿐 그것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언급되어 있지 않아 상제님께서 괴질을 대속하신 시기와 병명을 알 수 없다.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 관련된 기록들을 찾아보니, 상제님께서 화천하실 즈음인 기유(1909)년 6월 조선은 ‘괴질’의 확산으로 두려움과 혼란 속에 빠져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대한매일신보》의 한글판과 국한문체 판을 살펴보았다. 《대한매일신보》 한글판의 기유(1909)년 6월 16일(양 8월 1일) 자에 ‘괴질치료’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청주군 서강 외2면 장태리에 사는 이경천 씨가 근일에 신고하는 중인데 그곳 경찰서에서 의원을 파송하여 지금 치료하는 중이라더라.”라는 내용이다. 청주지역에 ‘괴질’ 환자가 발생하여 경찰서에서 의원을 보내 치료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경』에 ‘괴질’이 청주에 창궐했다는 내용과 일치한다.

 

그런데 같은 날의 《대한매일신보》 국한문체 판에서는 한글판과 제목과 내용 면에서 다른 점이 두 가지 보인다. 먼저 제목이 ‘괴질치료’가 아니라 ‘호병하다(虎病何多)’로 되어있다. 이는 ‘괴질’이 곧 ‘호병’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청주군 서강 외2면 장태리에 사는 이경천 씨가 근일에 ‘호열자(虎列剌)’에 걸려 신고하는 중인데 그곳 경찰서에서 의사를 파송하여 지금 치료하는 중이라더라.”라고 되어있다. 이것을 한글판과 비교해 보면 청주 사람 이경천 씨가 걸린 ‘괴질’이 곧 ‘호열자(虎列剌)’임을 알 수 있다. 즉 당시 사람들은 청주지역에 발생한 질병을 ‘괴질’, ‘호병’ 또는 ‘호열자’라고 불렀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01

 

이때의 ‘괴질’은 점차 전국적으로 유행하였다. 지규식이 쓴 『하재일기(荷齋日記)』02 8월 11일(양 9월 24일)의 기록을 보면 “서울 부근에 호역(虎疫)이 크게 치성하여 매일 사상자가 몇백 명씩 발생하니 매우 소란스럽다.”라고 되어있다. 서울 인근 지역까지 ‘호역’이라고 하는 전염병이 퍼져 매일 많은 사망자가 속출함에 따라 사람들이 혼란에 빠져 있다는 내용이다.

같은 날 발간된 《대한매일신보》 국한문체 판의 기사이다.

 

‘호열자’는 본래 한국에서 ‘쥐통’이라 칭하던 ‘괴질’이니, 이 병에 걸리면 완연히 쥐 같은 물건이 사지(四肢)로 올라오고 내려가는 것 같으며, 운신도 임의로 못하고 뼈만 남아 죽는 고로 ‘쥐통’이라 했다. 이 병이 한 집에 들어가면 한 집의 사람이 거의 다 죽고, 이 고을에서 저 고을로 칡덩굴같이 뻗어가며 일거에 일어난 불과 같이 퍼져가는고로...03

 

 

 

조선에 ‘쥐통’, ‘호열자’라고 불리는 치사율이 매우 높은 ‘괴질’이 들불처럼 퍼져나가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상황과 병의 증상을 언급하고 있다. 감염 증상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쥐통’에서 언급된 것처럼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해서 온몸이 비틀리고, 구토와 함께 설사가 계속되면서 탈수증상이 일어난다. 그러다가 심장이 약해지고, 사지는 차갑게 식으며,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증상은 상제님께서 ‘괴질’을 대속한다고 하시며 김형렬에게 새 옷 다섯 벌을 급히 지어 오게 하여 겪으신 증세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짧게는 감염 후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발병하는 ‘괴질’의 특성으로 인해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더욱 컸다. 이러한 증상과 특징은 다른 전염병과 ‘괴질’을 확연히 구분할 수 있게 해 주었다.04

 

위에서 제시한 몇 가지 기록들을 통해 기유(1909)년 6월부터 조선에서 유행한 전염병을 ‘괴질’이나 ‘호병’, ‘호역’, ‘쥐통’ 그리고 ‘호열자’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호열자’의 또 다른 이름, ‘콜레라’

 

‘괴질’은 ‘쥐통’, ‘고레라’, ‘호열자’, ‘호역’, ‘호병’ 등으로 불렸다. ‘쥐통’은 《대한매일신보》의 기사와 같이 쥐 같은 물건이 발뒤꿈치를 물어 다리에 쥐가 나는 것처럼 근육 경련이 일어나 사지로 그 통증이 진행되다가, 혼자서는 거동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되어 결국 뼈만 남아 죽는다고 해서 붙여진 병명이다. 이를 막기 위한 방책으로 고양이 그림을 부적처럼 붙여 놓거나 고양이 가죽을 환자의 몸에 문지르기도 하였다.05

 

‘호열자’란 병명은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콜레라(Cholera)’의 일본어 음역인 ‘고레라’에 대한 한자어 ‘호열랄(虎列剌)’이 조선에 유입되어 사용되다가 ‘랄(剌)’ 자가 그와 모양이 유사한 ‘자(刺)’ 자로 바뀌면서 ‘호열자(虎列刺)로 쓰인 것이다. 일본어 표현인 ‘호열랄’은 1879년부터 조선의 외교문서나 『실록』에 등장하다가 1882년 《한성순보》가 발간되면서 일반인들에게 알려졌다. 이후 ‘호열랄’과 ‘호열자’가 혼용되었는데 한자로 ‘虎列剌’이라고 쓰기는 했어도 ‘호열랄’이라고 읽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1890년대 후반부터 순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이나 《뎨국신문》에서 한글로 ‘호열자’가 사용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호열자’라는 이름이 주로 사용되었다. 둘째는 감염되었을 때 그 고통이 마치 호랑이에게 물려 온몸이 찢겨나가는 것과 같다고 해서 ‘호열자’로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호역(虎疫)’은 ‘호열자’와 같은 의미의 전염병(疫)이라는 말이고, ‘호병’ 또한 ‘호열자’를 말한다. 그러나 광복 이후 미 군정기를 거치면서 ‘Cholera’를 영어 발음 그대로 표기하여 ‘콜레라’로 부르게 되었다.06

 

본래 ‘콜레라’는 인도의 풍토병이었는데, 영국이 식민통치를 위해 만든 교역로와 군대의 이동 경로를 따라 1817년 인도 벵갈 지방에서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 이후 ‘콜레라’는 여러 지역을 거쳐 1820년 중국에 상륙하였고, 이듬해 중국 전역을 휩쓸었다.07 조선 또한 신사(1821)년에 처음으로 ‘콜레라’가 유입되어 온 나라를 고통과 두려움 속에 몰아넣었다. 이때의 ‘콜레라’를 신사년에 들어왔다 하여 ‘신사년 괴질’이라고 부른다. ‘콜레라’는 이듬해까지 제주도를 비롯한 조선 전역을 휩쓸면서 수십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 그야말로 대참사를 가져온 낯선 전염병이었다. 중국을 통해 전염된 것으로 보고된 ‘콜레라’는 면역력이 전혀 갖춰지지 않았던 조선에 찾아온 대재앙이었다.

 

훗날 서양의 과학자들에 의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콜레라’는 비브리오 콜레라균(Vibrio cholerae)에 의한 급성 세균성 장내 감염증이다. 1854년에 이탈리아 과학자 필리포 파치니가 ‘콜레라’ 환자의 변에서 ‘콜레라’ 병원균을 최초로 발견했다.08 그 후 영국의 존 스노우가 수인성 전염병인 것을 찾아냈고, 독일의 로베르트 코흐가 원인균을 밝혔다.09 1877년 여름에는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가 닭 ‘콜레라’를 이용한 백신을 개발하면서 ‘콜레라’ 예방의 신기원을 이루었다.10

 

조선에서는 1899년 9월 16일에 ‘콜레라’가 세균에 의한 것임을 공표하고 ‘호열자 예방규칙’을 발표하여 감염 예방을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기유(1909)년 6월 중순(양 7월 하순)에 창궐한 ‘콜레라’는 7월 초순(양 8월 중순)에는 인천과 신의주로 퍼졌고, 7월 중순(양 9월 초순)에는 서울까지 번지면서 전국적으로 유행하였다. ‘콜레라’가 발생하자 퇴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는데, 『고조 광무제 실록』 기유(1909)년 8월 12일(양 9월 25일) 내용을 보면 “…호열자병(虎列剌病)이 더욱더 심해지고 있는 만큼 경찰관이 위험하다고 인정하는 우물은 사용을 금지하고 당분간 대한수도회사(大韓水道會社) 공용 수전(水栓)으로 무료로 급수할 것이니…”11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인성 전염병인 ‘호열자병’ 즉, ‘콜레라’를 퇴치하기 위해 오염된 우물 사용을 금지하고 무료 급수를 시행하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 속에서 8월 하순(양 10월 초순)경에 콜레라는 그 기세가 점차 약해지다가 10월 하순(양 12월)경에 마침내 사라졌다. 당시 ‘콜레라’ 감염자는 1,514명이었고 사망자는 1,262명으로 집계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통계는 1858년에 50여만 명이, 1886년과 1895년에 수만 명이 사망한 것에 비하면 아주 작은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12 상제님께서 ‘괴질’을 대속하는 공사를 보신 후 이전보다 사망자 수가 현저히 줄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상제님께서 괴질을 대속하시는 공사의 계기가 된 전염병은 기유(1909)년 6월 청주와 나주에 창궐한 ‘콜레라’로 추측된다. 당시 ‘콜레라’는 1821년 조선에 처음 들어온 이후 빠른 전염성과 높은 사망률로 인해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기에 괴질로 불려지던 전염병이었다. 하지만 상제님께서 “남북으로 마주 터지니 장차 무수한 생명이 잔멸하리로다.”라고 예시하시며, 몸소 대속하신 이 괴질을 단지 콜레라 하나로만 한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증산의 생애와 사상』 ‘화천’편의 ‘병겁을 대속함’이라는 장에는 괴질을 대속하시는 공사 내용이 나온다. 이 장은 기유(1909)년 6월 20일경 상제님께서 화천하시기 며칠 전 병겁을 대속하시는 공사를 기술하고 있다.

 

증산께서 그 자리에 누워서 병을 앓기 시작하셨다. 종도들은 자신들이 지나쳤나보다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그것을 알아차리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이런 모든 병을 앓아 대속하고, 세계의 창생(蒼生)들로 하여금 영원한 강령(降靈)을 얻게 하리라.』 한 병을 두어시간씩 번갈아 앓으시곤 일어나 앉으셨다. 앓으실 때에는 수척하시고 열기가 올랐으나, 일어나시면 그런 증세가 가시고 원기가 솟았다. 질병에서 회복하시고 『세상에 있는 모든 병을 다 대속하였다. 그러나 오직 괴병(恠病)만은 그대로 남겨두고, 너희들에게 의통(醫統)을 전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이 앓으신 증세는 운기(運氣), 상한(傷寒), 황달(黃疸), 내종(內腫), 호열자(虎列刺) 등이었다.

 

이 기록을 통해 상제님께서 화천하시기 직전에 행하신 제생 23절의 공사는 단순히 일개 전염병인 콜레라만을 대속하시는 공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상제님께서는 당시 괴질로 여겨졌던 콜레라가 남북에서 창궐하자 이를 계기로 콜레라로 대표되는 인류 생존에 치명적 위협이 되었던 괴질들을 대속하여 창생의 살길을 여신 상징적 공사를 행하셨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이 공사는 개벽 시기에 닥칠 병겁인 ‘괴병’을 제외하고 앞으로 있을 창생이 맞닥뜨릴 수많은 전염병과 병증으로부터 인류가 대응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시는 공사로 해석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사실 원인을 알 수 없어 괴질로 불렸던 콜레라와 같은 치명적 전염병들이 오늘날에는 신속하게 그 원인이 밝혀져 예방과 치유가 가능하게 된 일은 이 공사가 지니는 의미를 잘 보여준다. 화천하시기 직전의 이 대속 공사가 아니었다면 단기간에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20세기의 치명적인 전염병들로부터 인류의 생존이 가능했을까? 헤아릴 수 없는 상제님의 덕화를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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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대한매일신보》 한글판에는 “괴질치료 쳥쥬군 셔강외이면 쟝ᄐᆞㅣ리에 사ᄂᆞᆫ 리경텬씨가 근일에 괴질노 신고ᄒᆞᄂᆞᆫ즁인데 그곳 경찰셔에서 의원을 파송ᄒᆞ야 지금 치료ᄒᆞᄂᆞᆫ즁이라더라”라고 되어 있는 반면에 《대한매일신보》 국한문체판에는 “虎病何多 淸州郡셔江外二面場台里居ᄒᆞᄂᆞᆫ 리敬天氏가 近日 虎列剌에 罹ᄒᆞ야 辛苦ᄒᆞᄂᆞᆫ 中인대 該地警察署에셔 의師를 派送ᄒᆞ야 現方治療中이라더라.”라고 되어 있다.

02 『하재일기(荷齋日記)』는 양근(楊根) 분원(分院)에서 만든 그릇을 궁궐 등에 납품하던 공인(貢人) 지규식(池圭植)의 일기로, 고종 28년(1891)부터 1911년까지 20여 년간 기록하였다. 「하재일기」, 서울역사편찬원, http://history.seoul.go.kr/
03 “호列剌ᄂᆞᆫ 한國에셔 일즉 ‘쥐통’이라 名ᄒᆞ던 怪疾이라 人이 此疾에 罹ᄒᆞ면 隱然히 鼠와 如ᄒᆞᆫ 物이 四肢百體로 上下ᄒᆞᄂᆞᆫ 듯ᄒᆞ야 屈伸을 任意치 못ᄒᆞ고 麻비ᄒᆞ야 死ᄒᆞᄂᆞᆫ 故로 ‘쥐통’의 名을 得ᄒᆞᆷ이라 ‘쥐통’이란 것이 壹家에 入ᄒᆞ면 壹家가 幾盡死ᄒᆞ며 壹村에 入ᄒᆞ면 壹村이 幾盡死ᄒᆞ고 村에셔 村으로 郡에셔 郡으로 蔓草ᄀᆞᆺ치 延ᄒᆞ며 原火ᄀᆞᆺ치 燎ᄒᆞᄂᆞᆫ 故로…” 《대한매일신보》, 기유(1909)년 8월 11일(양 9월 24일).
04 신동원,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 (경기: 역사비평사, 2004), pp.18-19 참조.
05 김상태, 「괴질, 호열자라 불리며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전염병 ‘콜레라’」, 《건강나래》 3월호 (2018), http://hirawebzine.or.kr/
06 신동원, 『호환 마마 천연두』 (경기: 돌베개, 2013), pp.149-150 참조.
07 김신회, 「1821년 콜레라 창궐과 조선 정부 및 민간의 대응 양상」, 『한국사론』 60권 0호 (2014), p.425.
08 「콜레라」, 『네이버 백과사전』
09 아노 카렌, 『전염병의 문화사』, 권복규 옮김 (서울: 사이언스 북스, 2001), p.212.
10 미래창조과학부, 「바이러스 발견부터 백신 개발까지」, 《R&D KIOSK》 21호 (2016), p.3.
11 “…虎列剌病이 益益 猖獗ᄒᆞᄂᆞᆫ바 警察官이 危險ᄒᆞᆫ줄노 認ᄒᆞᆫ 井水ᄂᆞᆫ 使用을 禁止ᄒᆞ고 現今間은 大韓水道會社共用水栓으로ㅄㅓ    無  料給水
지니…” 『고조 광무제 실록』 기유(1909)년 8월 12일(양 9월 25일).

12 김상태, 「콜레라와 고양이」, 《VOM》 (서울: 서울대학교병원, 2013), pp.48-4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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